후기

제목[중국문학] <홍루몽> 사실과 허구의 공존2019-11-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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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홍루몽 51 ~60 발제.hwp (30KB)

 《홍루몽》 제51회 설보금의 회고시 ~ 제60회 말리분과 복령상

 

설보금이 회고시 열 수를 지었다. 여덟 수는 실제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 나머지 두 수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다. 보차는 이를 구분하려 한다. 여덟 수는 역사 기록에 근거가 있는데, 두 수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 우리가 모른다는 이유로. 대옥은 이에 반발한다. ‘역사적 사실을 고찰할 수 없고 그 외전을 보지 않아 근거를 알 수는 없지만’ 늘 ‘보았’고, ‘세 살짜리 애들도 다 아는 얘기인데’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모른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아마도 보차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허구, 지어낸 이야기라 말하고 싶었으리라. 속마음을 숨기며 검증되고 바른 말만 하려는 보차와 매사에 감정이 극단까지 치달으며 쏟아내는 대옥. 두 인물의 갈등은 그 자체로 사실과 허구의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구도로 놓고 보면 이 소설이 꽤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들이 있다. 왜 두 인물은 사촌이며, 그것도 성이 다른 사촌인가. 하필 한 집안에 살면서 한 남자를 두고 맞서게 되는 관계에 놓이는가. 굳이 보옥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자주 부딪힌다. 사실과 허구의 매끄러운 공존은 쉽지 않다. 사실은 ‘역사’라는 영역을 엄격하게 만들어 허구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근거를 대라는 엄격한 지적에 이야기꾼(혹은 소설가)은 대뜸 얼굴부터 붉히고 달려든다. 모르긴 뭘 몰라, 어린애도 다 아는 이게 사람 사는 이야긴데.

 

당연히 이야기꾼이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아니다. 소설가는 때로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빌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예를 들면 제54회에 등장하는 정월 대보름 잔치에서처럼. 가모는 눈먼 이야기꾼 할멈들에게 이야기를 청했다가 퇴짜를 놓는다. 전개가 빤한 재자가인의 이야기인데다가 사실과 전혀 비슷한 데가 없다는 이유로. 이야기는 허구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사실과 유사한 면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소설가의 의중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갈수록 역사 혹은 풍속 묘사라 할 무엇들에 집중한다.

 

가씨 집안과 대관원은 허구의 공간이면서 사실과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저자의 의도가 계산된 공간이기도 하다. 가씨 집안이라는 대갓집은 황제가 사는 궁과도 연결되어 있고, 집안을 돌보는 무수한 하인들의 위계를 통해 양민 혹은 천민이라 불렸던 이들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대갓집의 제사 풍속과 새해인사, 정월에 황제로부터 하사받는 녹봉, 멀리 떨어진 장원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의 목록, 대갓집의 구체적인 살림살이와 하인 다루는 법, 하인들의 일화를 통해 나열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세세한 심리묘사. 눈먼 이야기꾼 할멈들이 저지른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저자는 이토록 노력하고 있다. 물론 그 노력 너머에 분명 무언가가 더 있다. 애초에 역사와 소설은 따로 있었는가. 사실과 허구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보차와 대옥의 어머니가 한때는 가모라는 한 인물의 딸로 자매였던 것처럼, 사실과 허구 또한 따로 태어나지 않았다. 역사와 소설 또한 한 부모의 자식, 한 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성장했다. 허구의 상상력에 도움 받지 않은 역사, 역사적 사실에 영감 받지 않은 허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세월이 지나 자매가 낳은 자식들이 사촌이 되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사이가 되고, 결국에는 서로를 괴로운 존재로 여기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 저자는 예언한다. 이는 남들이 ‘학문’이라 부르는 것을 관두고 세상에 무시당하는 ‘이야기’를 써내고 있는 저자 자신의 한탄인가.

 

이런 종류의 한탄은 앞서 말한 정월대보름 잔치 장면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 눈먼 이야기꾼 할멈들의 이야기를 물린 후 가모와 희봉 등은 스스로 우스개이야기를 지어내보이겠다며 대결 아닌 대결을 한다. 가모의 이야기에서 이야기꾼이 사랑받는 비결인 현란한 재주는 원숭이(손오공) 오줌을 받아먹은 탓으로 밝혀진다. 이래서야 현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보았자 스스로 원숭이 오줌을 받아먹은 자임을 밝히는 꼴밖에는 안 되니, 누가 애써 재롱을 부리려 들겠는가.

 

다음 차례인 재롱꾼 희봉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모두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정색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다 말아버린다. 이야기를 기대하는 자들이 이야기꾼을 조롱해서야 쓰겠는가. 사람들이 재차 청하자 희봉은 자리를 정리해버린다. 설거지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나도 한가해서 재롱부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남의 이야기를 거저 받아먹으려면 최소한의 예의와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 맡겨놓은 듯 무례하게 굴면서, 수틀리면 악플 달 마음이나 먹지 말고 말이다. 이야기 역시 누군가의 재능이고 노력이며 노동임을 잊은 자들에게 좋은 가르침이다.

 

다시 보차와 대옥의 관계로 돌아가 보면 아직은 두 인물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지 않으며,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보차의 어머니는 대옥의 이모이며, 부모를 모두 잃었고 가난한데다 몸도 허약한 대옥을 보살펴주기도 한다. 보차 역시 악랄하게 누군가를 괴롭히는 성격도 아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특히 대옥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오해와 시기가 존재한다. 보옥과의 관계에서 대옥이 마음의 상처는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거라는 암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를 문학이, 사실을 강조하는 다른 학문들에 대해 가지는 열등감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문학은 스스로의 존재를 불안하게 여긴다. 대옥처럼 아름다우나 연약한 존재로 자신을 그려내면서, 문학은 그 불안을 드러낸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해 생명력이 소진될까 두려운 탓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불안은 문학을 써내려가는 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다. 매번 독자가 자신을 사랑하여 다시 찾아올 것을 믿지 못하고 ‘어떻게 될지 궁금하시면 다음 회를 보시라.’를 꼭 붙여야만 속이 시원한 이의 불안이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안다면, 더 오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모르는 이의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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