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라는
9와 4분의 3 승강장 에레혼 번역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겁부터 난다. 전문번역, 통번역학과, 번역 불가능성─번역이 들어가는 말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번역은 늘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지난 학기동안 써냈던 수많은 레포트들은 파파고와 바이두 번역기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신작 개봉영화에 박 모 번역가가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영화를 다 보고 원어 대사를 찾아 보기도 했다. 칸트 전집 번역을
가지고 대판 싸움이 난 학술계 동향을 보며 ‘팝콘각’을 잰
기억도 난다. 이런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번역이란 결국 단어 취사선택이라는
점이다. 파파고로 중국어 번역을 할 때에도, 순간 순간의
선택이 불가피하다. ‘나타나다’라고 입력한 것을 번역기가
‘体现[티씨엔]’이라는 중국어로
바꾸었다면, 이 단어를 ‘呈现[청씨엔]’이나 ‘显现[시엔씨엔]’으로 변경할 필요는 없는지 고민해야 한다. AI 번역이
처음 등장했을 때 번역가들이─정확히는 전국의 통번역과 학생들이 좌절했던 사건이 생생하다. 다행히도 뉘앙스를
체크하는 자질구레한 문제는 아직까지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다. 『Freedom, 어떻게 自由로 번역되었는가』를 읽어보면 이런 ‘취사선택 놀음’은 지금이나 19세기 말이나 마찬가지로 번역가의 숙명이었다. 아니, 19세기 일본의 번역자들은 ‘틀린 말이라도 어쨌든 문장은 만들어주는 번역기’ 따위에 의존할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들 자신이 번역의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번역자는 단어의 뜻을 ‘사회’라는 번역어에 떠맡기고는
그 뜻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물론 단어를 쓰는 사람이 반드시 자신이 쓰는 단어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일단 ‘사회’라는 번역어가 생겨나자,
사람들은 그 단어에 담긴 뜻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기라도 한 것처럼 society와 기계적인
치환이 가능한 단어로서 ‘사회’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본문
“제1장 사회社會 2절 후쿠카와 유키치의 번역어 ‘인간교제’” 중에서)
이렇게 번역어가 사회에 정착되고 나면, 최초의 번역자가 고민했던 흔적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야나부 아키라는
1장 7절 ‘뜻이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남용되는 번역어’ 부분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사회가 society의 번역어로 일본에 정착했을 때, 이 2음절 어휘에는 ‘사社’의 어감도 ‘회會’의 어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서 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19세기 말부터 이미 극소수에 불과했다. 번역자의 고충을
대중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번역어를 ‘작은
보석상자(카세트)’ 보듯,
힙한 것으로 치부하는 시각도 있었나보다. (야나부 아키라는 이러한 카세트 효과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보지만, 그가 논문을 쓴 시점이 1970년대~1980년대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19세기말~20세기 초 일본은, 번역서가 나오면 오역 때문에 알라딘에서 별점
테러 당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는 2021년 한국과 다른 세계인 것일까? 독자들은
잘은 몰라도 일본의 오랜 전통으로 인해 어려워보이는 한자어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게 된다. 일본어에서 한자어가 갖는 이런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란
작은 보석 상자를 의미하며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매혹하고 끌어당기는 물건이다. (본문 “제2장 개인個人 -
4절 평이한 단어를 사용한 번역의 어려움” 중에서)
후쿠자와 유키지의 번역에 대한 고생담(?)을 지나고 나면, 근대와 modern의
관계라는 더욱 착잡한 문제가 등장한다. 근대라는 단어에 양가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은가.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는 근대라는 과제가 적응해야할
것이면서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는 한 어르신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근대를 둘러싼 논의 자체는 굳이 새로울 게 없을만큼 익숙하다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흥미로웠던 점은 저자의 태도이다. 근대라는 키워드처럼 학자의 지식을 마음껏 뽑낼 수 있는 키워드도 드물다. 하지만
야나부 아키라는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근近이라는 단어에 어떤 가치를 담아냈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3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학문적 호기심을
말끔하게 해소해주지 않는 느낌도 들지만, 여태껏 족보식 서술에 관성처럼 익숙해져서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Freedom, 어떻게
自由로 번역되었는가』 를 읽고 나니 이제서야 얼마 전에 꾸역 꾸역 읽었던 번역과 기원에 대한 한 편의 글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기원론은 번역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영향’을 요술
방망이로 삼아 발신자와 중개자와 수신자라는 위계적 연쇄 고리를 추적하는 프랑스파 비교문학[1]은
전형적인 서구주의 번역론이었다. 그리하여 수신자의 위치에 자리한 비교문학적 한국 근대문학 연구란, 표절과 오역을 적발하는 한편 기원으로 되는 서구와 중개자 일본을 얼마큼 잘 번역했느냐를 박식하게 따지는 사냥질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 원본과 번역본의 관계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면 번역론이란 기존의
서구주의를 새로이 강화하는 변증에 다름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원식, 『한국개념사총서: 문학(2012,
소화)』 가운데 “Part 2: 기원론의 이력”에서
인용)
전반부를 읽고 나니, 책을
펼치기 전에는 예상치 않았던 효과를 기대하게 된다. 야나부 아키라의 연구 방법은 고전문학 연구에도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식하게 따지는 사냥질’만 잘 해도
괜찮은 성과물로 인정받는 고전문학 연구 영역의 한계로 고민해오던 때, 이 책을 너무 늦게 만나지 않아
다행이다.
[1]같은 책의 앞부분에서 나온 설명을 각주로 달아둔다. “서구 근대문학을 유일한 기원으로 경배하도록 훈육하는 프랑스파 비교문학littérature
comparée과 그 반동으로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일국주의一國主義, 이
양자를 가로질러 진정한 의미의 세계문학Weltliteratur을 내다본 안목의 핵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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