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0203 제5장 후기 고대 철학 발제_아라차
개인의 행복 추구는 어쩌다 천년의 암흑으로 이어졌을까
후기 고대 철학을 논하는 이번 장의 소제목들이 의미심장하다. 개인의 행복의 확보, 개인의 안녕의 확보. 과연 이 시기 개인의 행복과 안녕은 확보될 수 있었을까.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이 제도적 차원에서도 지성적 차원에서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시기이다. -기원전 300년경에서 기원후 400년경에 이르는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는 약화되고 권력은 특정 중앙 기관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개인이 정치적으로 무력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헬레니즘 및 로마 제국시대에 개인의 무력화는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멀리하고(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어떻게 하면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또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이 문제를 주로 다룬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생을 즐기되, 숙고하며 즐겨라. 선택지를 두고 이득과 손해를 따져보는 계산된 쾌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작정 부도덕한 탐닉에 빠지는 쾌락 지상주의는 손익계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에피쿠로스적이지 않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나 문학적 활동과 같이 정체되고 확실한 형태의 안녕을 강조한다. 정치적 활동도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를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법과 관습은 개인의 이익을 증진하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
스토아 학파는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요인들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라고 가르친다. 행복의 유일한 조건은 덕성스런 삶을 사는 것이고 덕은 앎에 기초한다는 것. 덕은 이성,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은 로고스, 즉 신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의 과제는 일어나는 모든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적 도덕을 설파하고 성품의 내적 강화를 위한 교육을 주장했다. 당시의 “외부” 상황(질병, 흉작 등)을 고려해 본다면, 자기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라는 가르침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얘기함). 이제 윤리학은 정치학과 결별한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사회와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자아를 수련해야 했다. 여기서 사회와는 분리된 사적 도덕의 이념이 엿보인다. 이같은 스토아학파의 윤리 사상과 법 사상은 중세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헬레니즘의 스토아 학자들(제논, 클레안테스, 크뤼시포스)은 세상으로부터의 금욕적 은둔만이 아니라 의무와 품성 형성을 강조했다. 이는 로마의 상층 계급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여 스토아 철학은 일종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퀴니코스(견유주의) 학파의 철학은 하층계급들의 생활 문화로 치부되고, 의무와 책임감을 기초로 하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은 국가를 뒷받침하는 도덕으로 강조되었다.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키케로, 세네카, 에픽테토스)에서는 금욕적이고 개인적인 은둔과 정치적 의무 사이의 긴장 양상 속에서도 자연법 사상의 발전을 가져왔다. 인간을 더 이상 한 집단의 유기적 부분이 아니라 보편적 국가와 보편법 하의 한 개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그 모든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세계 이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주어졌다. 법률의 토대는 개인이나 집단, 권력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당한 법은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개인이 보편적 이성과 공동의 법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 이처럼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보편타당한 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스토아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를 같이한다.
그러나 자연법 이론에는 원리적으로 이중성이 존재한다. 모든 인간의 근본적 평등을 주장하는 데도 불구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엄연한 불평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스토아 학파의 논리는 많이 모호하다. 모든 사람은 공통의 로고스에 참여하며 평등하지만, 동시에 부자인가 빈자인가, 왕인가 노예인가는 행복하고 좋은 삶과는 기본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핵심목표는 세상사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을 가지고 모든 운명의 장난에 맞서는 것이라고라? 사회변혁에 대한 사고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평등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 최대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너희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라고라??? 역시 키케로와 같은 부자 정치인에게나 유효했을 법한 논리이다. 키케로는 소유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영원하고 불변적인 타당한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시민적 연대와 인간성을 옹호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우주론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의 총체적 세계에 속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 로마 제국에 결여된 친밀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거대한 바퀴를 돌리는 데 하나의 톱니로서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 개인이 존재해야 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로마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었고, 개인과 황제까지의 거리도 아주 멀었다. 이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스토아 학파는 개인과 우주의 조화를 상정하였다. 그들은 신과 인간 모두에게 존재하면서 인간의 형제애를 보장해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같은 흐름으로 보아 서두의 질문이었던 “어떻게 한 사람의 행복이 확보될 수 있는가”에는 만족할 만한 답변이 제시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일부는 물질적 부를 전제하고 있는데 고대에 부유했던 사람은 비교적 소수였다. 또한 모든 답변이 인간이 불행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공통된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확고한 스토아주의자라 하더라도 (세네카처럼)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행복감을 유지해내는 데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학설들 중 어느 것도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낸 이 인생철학들은 그것들이 약속한 것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확보할 것인가?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초자연적인 수단을 통해서, 즉 종교를 통해서였다???? 고대 말이 되면서 종교적 갈망은 커져만 갔다.
신플라톤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종교적 갈망에 부응하고자 했다. 신플라톤주의는 개인을 보다 광대한 우주론적 그림 안에 위치시키고 악을 결여로, 비존재로 묘사했다. 육체(물질)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영혼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일자론을 주장한 플로티누스가 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이 신플라톤주의를 구체적인 현실 종료로 파악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학설일 뿐 삶 자체는 아니었다. 살아 있는 인격신과 구원으로서의 천국의 메시지를 갖고 기독교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저 종교적 갈망은 만족할 만한 답을 찾는다.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고대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기독교적 중세가 문전에 다다라 있었다.
개인의 안녕과 행복은커녕 개인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시대로 넘어가기 전에 누가 좀 답을 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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