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물리학》 4장 자연과학 고전물리학의 세계가 양자물리학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여기는 저자는 이제 물리학을 넘어 자연과학 전체의 통합을 추진한다. 이 통합을 추진하는 아이디어는 슈뢰딩거에게서 나온다.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낚은 이 책의 제목 ‘고양이와 물리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슈뢰딩거는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물리학을 넘어 생물학으로 확장된 자신의 관심사를 정리했다. 슈뢰딩거는 “생명을 가진 물질은,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물리법칙‘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164쪽)라고 썼다. 문제는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이 무엇이며, ’다른 물리법칙‘은 무엇으로 보는가에 있다. 먼저 ’다른 물리법칙‘을 양자물리학으로 볼 수 있다. 양자물리학은 당시에 고전물리학에 비하면 더 최근에 확립된 물리학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고전물리학이 등장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을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으로 보고, ’다른 물리법칙‘이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우리가 물질이나 생명을 이해하고 구분하려 할 때 부딪히는 난점들을 보면 이 관점도 설득력이 있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생물학의 시작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생물에서 생물이 발생하는 과정도 이해하지 못한다. 생물이 의식을 지니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다음 문제다. 물리법칙으로 생물학을 읽어가는 슈뢰딩거에게 중요한 법칙은 열역학이었다. 특히 엔트로피 증가를 설명하는 열역학 제2법칙은 생물의 생존기술을 설명할 때 중요했다. 지구의 생물은 태양으로부터 열에너지를 얻고 이를 일로 전환하여 자신의 엔트로피를 주변 환경보다 낮게 유지한다. 식물의 광합성처럼 동물의 음식 섭취는 고도로 구조화된 물질을 섭취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추는 과정이다. 슈뢰딩거에게 영감을 받은 스웨덴 물리학자 페르-올로브-뢰브딘은 1964년 ’양자생물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172쪽) DNA 복제와 유전자 돌연변이 과정에서 양자물리학으로 설명되는 양성자 터널링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양성자 터널링이 불가능하기에 이 이론이 증명된다면, 생명체에는 양자물리학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이 이론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물리학자가 환원주의에 매료되지는 않는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의 ’양자‘와 생물학의 ’생명계‘가 유사하다고 보았지만, 환원주의에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 의심은 상보성 철학으로 연결되었고, 저자는 이를 통해 생명체의 생존과 물리적 이해는 상보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환원주의를 거부하던 철학자를 발판 삼아 양자물리학으로 대동단결하겠다는 환원주의적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저자는 생물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면서 생명(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이 사라지리라고 말한다. 생명 과정이 양자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면, 생명 과정도 얼마든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조작할 수 있다. 생명 없는 물체를 연구하는 물리학이 진화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생명이 무생물보다 존재론적 우위를 차지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변화와 계의 상태를 설명하는 물리학이 구성의 과정으로 생명과 진화를 바라보지 못할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제 물리학적 생명 논의는 의식의 문제로 넘어간다. 골수 환원주의자인 저자에게 의식은 양자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결정론과 무작위성의 문제이다. 인간의 세계는 오랫동안 결정론이 지배했다. 삶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불확정성(혹은 불확실성이나 무지)은 인간의 고통을 가중했다. 양자물리학은 이런 세계에 불확정성을 하나의 원리로 도입했다. 이제 인간에게 모든 무지가 사라지는 날은 결코 올 수 없다. 양자물리학적 대통합은 결정론과 무작위성마저 함께 포용한다. 우주 전체가 거시적 수준에서 결정되어 있다면, 하위 시스템에서 우주는 무작위적이다. 불확정성은 물체가 다른 물체와 얽히면서 나타난다. 물체들의 상호작용은 불확정성을 유발하고 우주 안에 사는 우리는 불확정성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우주 전체는 거대한 결정론의 세계다. 이 결정론적 세계를 지각하려면 우주 밖으로 나간다는 불가능에 직면해야 하지만 말이다.
물리학이 무생물을 연구한다면, 생물학은 생물을 연구한다. 많은 이들이 생물의 특징을 목적성에서 찾는다. 그런데 결정론적 우주,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주라는 개념과 맞닥뜨리고 나면, 생물의 고유한 특징을 말하기가 애매해진다. 생물 역시 물리법칙 안에서 살아가며, 다른 사물과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무생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환원이 주는 깨달음은 과연 우리가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보도록 만들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