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 두 번째 상 물리학과 선택된 소수 유색인의 피부가 검은 이유는 모두가 알다시피 멜라닌 때문이다. 멜라닌은 머리카락 등 인체의 각종 세포를 구성하며, 오징어의 먹물처럼 다양한 생물체에도 분포한다. 이 생물체 구성성분인 멜라닌이 인간 세계로 오면 그 자체로 ‘인종’이라는 사회적 해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인간 사회에서 멜라닌은 하나의 물질을 넘어 특정 인간 집단의 성격과 신분, 각종 능력, 폭력성 여부 등 사회적 신분 전반을 규정짓는 문제이다. ‘인종’은 단지 인간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다. 이 기준은 권력을 구조화하는 체계이다. 저자는 진화생물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셰이아킬 맥린이 <사회적 구조, 역사적 근거>에서 언급한 내용을 인용한다. “인종의 유용성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려는 흐름을 따라 과거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추방과 약탈 과정에서 축적된 식민국과 제국의 권력을 안정화하는 데 있다.”(149쪽) 저자의 지적대로 인종 개념과 인종차별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 세계를 물질로 바라보던 물리학자인 저자에게 ‘멜라닌’과 ‘인종’의 간극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멜라닌’은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여 특정 ‘인종’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물질이다. ‘인종’은 ‘멜라닌’이라는 물질에 기반하면서도 과학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문제들을 일으킨다. 그 문제들은 과학을 넘어 인간 세계가 구성되고 유지되는 방식 전체를 결정하고, 이 방식을 정당화한다. 그러니까 ‘물리적’ 멜라닌이 사회적 ‘인종’을 결정한다. 물론 ‘인종’이 과학과 관련 없다는 말 역시 함정이다. 인종이 인간 세계의 유지 방식을 정당화하는 과정에는 과학도 포함된다. 과학 역시 인간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에 포함된다. 교육을 오래 정밀하게 받은 사람일수록 세계의 유지 방식이 정당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크다. 과학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 세계관 중심의 과학 교육을 받아온 저자 역시 과학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인간 세계는 오랫동안 흑인이 열등하거나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기며 노예제를 유지했던 백인 사회의 비과학적 인식과 비도덕적 태도를 거의 비난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과거 노예제를 바탕으로 유지되던 백인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도 감추려 한다. 이 백인 사회가 여러 대륙에서 유색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 그 파괴를 정당화하면서, 지금도 식민화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려 한다. 과학자로서 세계의 존재 방식에 의문을 품는 저자는 자신이 ‘기본적이고 뻔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았다고 밝힌다.(159쪽) 그런 저자에게 ‘멜라닌’은 ‘너무 많은 죽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물질’이다.(165쪽) 물론 과학계에는 멜라닌을 다르게 활용하려는 노력도 있다. 멜라닌을 초전도체나 전자-이온 하이브리드 전도체로 보고 친환경 에너지로 활용하려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아프리카와 과학 기술을 접목한 ‘아프로퓨처리즘’으로도 연결된다. 이런 기술이 지금까지 착취당했던 흑인을 이용하는 또 다른 자본주의적 용법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흑인이 ‘멜라닌’이라는 특정 물질(대상)로 여겨지기보다 과학자인 자신이나 와칸다의 슈리 공주처럼 무언가를 다루는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 듯 보인다. 물론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이런 일은 쉽지 않다. 또 그런 주체가 되는 일이 5장 후반부(171쪽)에서 언급하듯 ‘미국이 바로’ 서는 일이라면 이 역시 미국식 애국주의 안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일이다. 흑인으로서 저자는 흑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과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흑인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블 세계관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와칸다가 전 세계의 흑인을 구원할 수 없듯이 ‘아프로퓨처리즘’만으로는 흑인의 미래를 바꿀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은 숙련이 필요한 지식으로서, 그런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이를 배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색인이나 소수자가 지식인이어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인종차별을 감지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중력렌즈 현상’과 연결해 이야기한다.(185쪽~) 휘어진 시공간을 통과하는 빛이 렌즈 역할을 하는 은하단으로 인해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이 ‘중력렌즈 현상’이다. 강한 중력렌즈 현상에 비해 ‘약한 중력렌즈 현상’은 미묘하기에 감지하고 분석하는 기술이 더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미묘하게 감지하고 복잡한 분석기술을 가진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소수자 운동이나 탈식민 논의가 지식과 지식인 중심으로 흘러갈 때 나타나는 문제들이 여기에서도 반복된다. 물론 흑인이자 (에이젠더라고 주장하지만, 여성으로 취급되는) 여성인 저자가 백인 남성이나 백인 여성, 특히 자본주의의 특혜를 입고 지식인 집단이 된 이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편을 들어줄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의 무기로 전문지식을 이용할 때 그 지식은 분명히 배제의 도구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경험이나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진짜와 진짜가 아닌 것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188쪽) 저자에게 백인이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는 일이나 과학 비전문가가 과학에 대해 말하는 일은 같은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전문지식’이 바로 무엇인가. 오랫동안 흑인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백인들의 논리체계 안에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권한의 일종이 아니던가.
저자는 7장에서 정체성 논의를 더 복잡하게 전개한다. 그는 과거의 백인 여성 과학자 캐럴라인 허셜의 업적을 보호하면서도 영웅으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또 거대망원경 설치에 반대하는 마우나케아 여성 원주민과 백인 여성 과학자의 갈등을 예민하게 바라본다. 저자처럼 유색인이자 여성이지만, 미국인이 아니며 과학자도 아닌 나 역시 ‘불가피한 연대’(224쪽)의 관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때로는 옹호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