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크라테스의 검열
"사람들이 신들과 부모를 공경하고 서로간의 우애를 경시하지 않으려면, 이런 것들이 신들에 관해 들어야 할 이야기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네."(140)
정의에 대한 문제. 이를 고찰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상적인 작은 국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탐구가 이어지고, 나아가 이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 가운데 수호자, 즉 군인을 교육하는 문제를 다룬다. 수호자는 한편으로는 기개를 한편으로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시가 교육이 먼저 필요하다. 그럼 어떤 시가詩歌를 배워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당시 시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심어주므로. 따라서 3권에서는 어떤 내용을 빼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우선 용감이 미덕인 수호자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 들려줄 것. 죽음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삭제하자.(141)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를 비롯해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 가운데 여러 부분을 삭제할 것을 제안한다.
훌륭한 사람은 죽음을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친구의 죽음에 비통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이유가 더 필요한데, 훌륭한 사람은 '가장 자족할 수 있으며 누구보다 남들에게 덜 의존'(144)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저 유명한 이야기, 헥토르에게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비통하며 슬퍼했다는 이야기도 삭제해야 한다. 그런 비탄의 노래는 '덜 존경스러운 여자들이나 못난 남자들'(145)이 읊는 것이다. 나아가 너무 웃음이 많아도 위험하다. '웃음이 심하면 으레 심한 심적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147)이므로.
비탄도 폭소도 없는 나라. 소크라테스가 그리는 나라는 진실성을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다. 이 진실함이란 정의/진리/사실과 가까운 것이며 거짓/환영/상상/모방 등은 이와 멀다. 그래, 소크라테스의 나라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 거짓말할 자격이 있다면 다름 아닌 국가의 치자들이네. 그들은 적들이나 시민들의 행위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 밖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네."(148)
비탄과 폭소, 거짓이 없는 나라. 여기에는 또한 절제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절제란 대개 치자들에게는 복종하되, 먹고 마시고 성교하는 즐거움에서는 자신들이 치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149) 치자와 피치자의 구분, 철인과 대중의 구분은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절제와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테다. 과연 수호자, 철인의 절제란 어떤 것일까? 쉬이 말해 여러 감각에 휘둘리지 말 것. 먹고 마시고 성교하는 모든 것에 절제를! 따라서 신들이 탐욕을 부리는 이야기들도 모두 삭제해야 한다.
결국 수호자들은 미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양념 없이 단순한 음식, 단순하고 담백해야 한다. 절제란 단순함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채로운 음악은 무절제를 낳고, 다채로운 음식은 병을 낳네. 그러나 음악에서 단순함은 혼 안에 절제를 낳고, 체력단련에서 단순함은 몸을 건강하게 해주겠지?"(184)
소크라테스는 그의 나라에서 이야기를 내쫓고, 양념을 내쫓으며, 비탄과 웃음, 공포와 환희를 없애버리고자 한다. 그가 심의등급을 심사하는 사람이었다면 꽤나 깐깐한 잣대로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교육의 이름으로 다양한 것을 삭제해야 한다고 크게크게 주장했을 테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플라톤의 <국가>는 한권의 철학서라기보다는 성경의 주석처럼 보인다. 기독교에 만연한 정신의 뿌리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상의 나라를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욕, 절제, 진실. 이를 위해 다양한 금기가 필요하다. 서구 기독교가 오래도록 성(sex)을 억압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한국 기독교에서 술과 담배가 금지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술과 담배는 탐욕과 타락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다양한 것을 내쫓는다. 읽어야 할 것과 읽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특정한 감각을 배제한다. 비탄, 절망, 우울, 폭소, 풍자, 허풍 ... 오직 사랑과 평안만이 깃들기를. 그리고 그 위에 용기를. 헌데 따지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기획은 틀리지 않았다. 감각이 거세된 용사들은 어찌나 담대한가. 그들은 결코 물러설 줄을 모른다. 그것을 용기, 혹은 기개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틀거리지 않는 그 정신의 위력을 오늘도 쉬이 발견할 수 있다. 십자가 아래에서, 성조기 아래에서, 그리고 얼마전 광화문 광장에서.
2. 단일성에 대한 추구
버려야 할 것들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남아야 할까? 신들의 이야기는 정리되었고 이제 인간의 이야기에 대해 논의를 할 차례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일단 자세한 논의를 미뤄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인즉, 정의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 이 문제를 정확히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가 어떤 것이며, 올바른 사람으로 보이건 보이지 않건 올바른 사람에게 정의가 본성상 어떻게 이익이 되는지 밝혀내기 전에는, 인간들에 관해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야 하는지 합의해서는 안 되네."(157)
깔끔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다음 문제는 문체에 관한 논의이다. 소크라테스는 크게 둘로 나눈다. 단순한 서술과 모방. 모방이란 글쓴이가 등장인물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소크라테스는 '모방 없는 단순한 서술'(160)을 추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2권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무엇처럼 보이는 것은 그 자체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글쓴이 자신을 감추도록 하는 한편,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이는 것처럼 만든다. 둘 모두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시와 이야기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모방에 의존하는 비극과 희극, 시인 자신의 간결한 서술, 모방과 서술을 모두 이용하는 서사시.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 아데이만토스는 비극과 희극을 몰아내자고 말한다. 그 이유로 하나가 더 추가되는데, 한 사람은 하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모방을 한다 하더라도 수호자는 훌륭한 사람, '용감하고 절도 있고 경건하고 자유민답고 그 밖에 그와 자질이 비슷한 사람들'(163)을 모방해야 한다. 비극을 모방해서도 희극을 모방해서도 안 된다.
단일성에 대한 추구. 신은 단일하며 다른 무엇으로도 바뀌지 않는다. 신이 그렇다면 정의도 그럴 것이고, 진리도 그럴 것이다. 사실도 마찬가지. 신, 정의, 진리, 사실 등은 늘 대문자로 존재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찮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더 무엇이든 모방하려 들 것이며...'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나라에는 다재다능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각자가 한 가지 일만 하므로.'(168)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나라에는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만 남는다. 시인 같지 않은 시인, 작가 같지 않은 작가들도.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더 엄격하고 덜 재미있는 시인과 이야기 작가로 만족할 것이네"
영화 '조커'는 제목 자체로 하나의 희극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용은 복잡하다. 늘 웃는 조커는 늘 웃지 못하기 때문에 웃어야 한다. 그 웃음은 늘 기만이다. 광대의 입은 웃고 있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커의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남긴다. 나아가 영화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흐려놓는다. 요즘 사람이 이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지. 소크라테스가 이를 비평한다면 어땠을까? 망상과 현실을 오가는 서사를 비판했을까? 조커라는 이름의 범죄자, 그 모순을 꼬집었을까. 아니면 웃음 대신 절제가 필요하다며 '조커'라는 제목 자체를 문제 삼았을까. 그전에 가상에 취하는 극장이라는 장치를 문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게도 스스로 동굴로 기어들어가 가상에 취해 나오다니.
아무리 보아도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감각적 세계의 현실과는 영 동떨어진 인물이다. 음악도 마찬가지. 소크라테스는 노래를 세 요소로 나누고 그 각각이 어때야 하는지를 논한다. 노랫말, 선법, 리듬. 우선 중요한 것은 노랫말이다. 시가를 논의했던 것과 동일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들에는 애도나 비탄은 필요 없다고 합의했네."(170) 선법과 리듬도 이를 따라야 한다. 그러니 화려하고 격정적인 선법과 리듬을 버리자. 나아가 그는 몇 가지 악기를 제외한 나머지 악기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피리를 버리자. 피리가 지목된 이유는 다양한 음을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나라에는 정해진 음과 리듬만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시가와 이야기가 정의의 관점에서 윤리적 문제로 다루어졌다면 이제 노래는 미학적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정의를 방해하는 노래를 내쫓아 소크라테스는 그의 나라를 '정화'(173)했다. 그 결과 그의 나라에는 우아한 것만이 남는다. "좋은 리듬에는 우아함이, 나쁜 리듬에는 추함이 따른다는 것쯤은 당장이라도 구분할 수 있겠지?"(174) "좋은 말씨, 조화, 우아함, 좋은 리듬은 모두 좋은 성격에 달려 있네. 내가 말하는 좋은 성격이란 세상 물정에 어두운 호인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 아니라, 진실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성격을 갖춘 지성을 의미하네."(175)
조화롭지 못한 음악은 추하며, 나아가 혼을 어지럽힌다. 이렇게 올바른 것은 좋은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과 맞물려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악한 것, 나쁜 것, 추한 것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감각의 정치성을 오래전에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그의 논의는 중요하다. 누구에겐가 불편한 음악은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차이 이전, 어떤 근원적인 무엇을 건드리고 있다. 권위를 침해하거나 가치를 흔들거나 등등.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음악을 듣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글라우콘, 시가 교육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첫째, 리듬과 선법은 그 무엇보다 더 깊숙이 혼의 내면으로 침투하여 우아함을 가져다줌으로써 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네. 그것들은 누가 좋은 교육을 받았을 경우 그를 우아하게 만들고, 누가 나쁜 교육을 받았을 경우 그를 그와 반대되는 사람으로 만드네. 둘째, 이 분야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은 예술작품이나 자연의 결점들을 가장 분명히 알아보게 될 것이네. 그러면 그는 그것들의 추함이 역겨워 아름다운 것들을 칭찬하고 반길 것이며, 아름다운 것들을 그렇게 혼 안으로 받아들이면 그 자신도 아름답고 훌륭해질 것이네."(177)
3. 아름다운 사랑이란
이제 사랑 이야기이다. 시가, 이야기, 노래를 통해 감정과 감각을 다루었으니 이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그러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가장 사랑하게 될 것이고, 혼과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것이네."(178)
사랑은 대상도 중요하지만 방식도 중요하다. 조화, 절제, 나아가 금욕!
"올바른 사랑은 광적인 것이나 무절제와 관련된 것과는 어떤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되겠지?" / "네, 안 돼요." / 그렇다면 올바른 사랑은 성적 즐거움과는 무관해야 하며, 올바르게 사랑하는 연인도, 올바르게 사랑받는 연동도 성적 즐거움에 탐닉해서는 안 되네."(180)
앞의 논의를 참고하면 올바른 사랑에 대한 이 논의는 그리 낯설지 않다. 비탄과 폭소, 격정과 욕망을 몰아내었는데 사랑에 어찌 다른 무엇이 끼어들 수 있을까. 그러니 사랑도 합리적으로. 결코 미친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이 짧은 논의는 혼과 몸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몸과 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둘의 조화를 이야기 하나 결국 그 이야기를 뜯어보면 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이유는 몸이 혼을 바꾸지는 못하나 혼이 몸을 바꿀 수는 있으므로.
"내가 보기에, 만약 몸의 상태가 좋다면, 몸이 자신의 탁월함으로 혼까지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세. 그와 반대로 좋은 혼은 자신의 탁월함으로 몸을 최대한 좋게 만드네."(181)
혼과 몸의 분리, 그리고 혼의 중요성에 대한 서술은 몸과 관련한 문제를 낯선 방향으로 이끈다. 우선 혼을 중시하는 까닭에, 소크라테스에게 의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의술은 건강을 위해 사용되어야지 생명연장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삶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며, 이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삶이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겠지?"(187) 그래서 이런 위험한(!) 생각에 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자네는 우리나라를 위해 이런 종류의 사법제도와 더불어 우리가 앞서 말한 의료제도를 입법화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런 제도들은 시민들 가운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보살피되,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정신적으로 불치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손수 죽일 것이네."(193)
소크라테스의 나라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상이며, 이론일 뿐이다. 실제하는 나라에 대해 논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이런 주장이 실제로 옮겨진 예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이상 국가를 위해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 두고, 나아가 누군가를 죽이기까지 한 사건은 멀지 않은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폭력'의 이름이 아닌 '건강'을 추구한다는 이유를 들어 의료권력의 모습으로 자행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입법하자는 것이 처벌제도가 아니라 '의료제도'라는 점을 기억하자.
이렇게 검열과 배제, 추방과 처벌의 반복 속에 소크라테스의 국가는 아름다운 이상을 구현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제 수호자들을 위한 교육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이들의 생활에 대한 논의가 잠깐 언급되며 3권이 마무리된다. 내용은 간단하다. 수호자들은 필요 이상의 개인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되고, 집 같은 사유 공간을 가져서도 안된다. '자제력 있고 용감한 전사들'에게는 최소한의 적절한 삶이 주어져야 한다.
"그들은 군영의 전사들처럼 공동식사를 하며 공동생활을 해야 하네. 우리는, 그들의 혼에는 이미 신이 주신 신성한 금과 은이 영원히 내재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따로 인간의 금이 필요 없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천상의 금을 지상의 금과 섞어 오염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인데, 그 까닭은 금은 순수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유통되는 금은 수많은 악의 원천이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어야 하네."(207)
공동식사와 공동생활 그리고 지상의 금이 아닌 천상의 금을 추구하는 삶. 여기서 자연스레 드는 질문, 그럼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한 사람을 소유하고 가족이 개별적으로 독립된 식탁과 거주 공간을 갖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비단 소크라테스의 나라에서만 보이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국가, 혹은 공동체를 꿈꾸던 곳이라면 이와 비슷한 경향을 어디서건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국가들이, 공동체들이 좋건 나쁘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