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무대》 철학의 무대, 광기와 사회 <철학의 무대>는 1978년 푸코가 일본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와타나베 모리아키와 진행한 대담을 수록한 글이다. 두 사람은 1970년 푸코의 첫 일본 방문 이후 계속 교류해 왔으며, 와타나베가 푸코의 저작을 번역하는 등 푸코의 사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와타나베가 문학 전공자이며 연출가라는 점을 통해 일본에서 푸코가 문화연구 영역에서 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와타나베는 푸코의 사유 전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철학의 무대>도 문화이론을 다룬다기보다 푸코 사유의 전반적 특성들을 폭넓게 다룬다.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인 ‘철학’과 ‘연극’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두 영역의 공통점을 강조하기보다 각자의 영역에서 중요한 지점, 특히 푸코가 철학에서 중요하게 보는 지점들을 강조한다. 푸코의 철학을 이해하는 일은 푸코가 철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는 기존의 ‘철학’ 개념을 거부한다. ‘연극’과 ‘철학’ 모두 시선이 중요하지만, 두 영역에서 시선의 가치는 다르다. 서양철학에서는 허구의 가치가 인정된 적이 없다. 서양철학은 합리성을 위한 무대였고, 그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해 광기나 범죄 같은 요소는 특정한 시선과 연결되었다. 푸코에게는 허구가 아닌 진짜, 혹은 변함없는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사건’이 중요하다. 푸코는 진리를 상연하는 무대가 아닌 ‘사건’을 포착하고 반복하는 ‘무대’의 역할에 주목한다. 푸코가 시선을 포착하는 곳은 구체적인 공간이다. 푸코는 병원, 감옥, 군대라는 공간과 권력을 연결 짓는다. 푸코에게 공간은 ‘역사’를 이룬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사회가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고 거기에 힘의 관계를 써넣었는가’이다.(27쪽) 공간의 가치 결정과 배분은 하나의 국가, 사회의 역사를 말해준다. 공간은 차이를 형성하며 ‘배제’와 ‘감금’을 가능하게 한다. 17세기 자본주의 사회 성립 이후 유럽의 도시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푸코는 ‘구조주의’에 대한 섣부른 개념화나 자신을 ‘구조주의자’라 칭하는 일은 거부하지만, 구조주의가 시간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다는 점은 인정한다. 구조주의 이후 시간은 단일한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가 혼재한 복수의 시간으로 이해된다. 와타나베는 이런 변화의 시점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 종식과 연관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푸코의 관심사가 ‘유럽 내부에서 이루어진 개인에 대한 지배’였음이 드러난다. 근대 유럽 내부, 혹은 국가 내부에서 ‘공간적 모델’은 군대였다. 사회 전체가 군대를 모델로 구성되었으며, 나폴레옹 제국이나 프로이센 국가가 그런 전형 중 하나였다.(35쪽) 공간에 관한 푸코의 관심은 말, 즉 담론에 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푸코에게 지식의 역사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써야만 하는 문제였다. 권력은 담론과 함께 작동한다. 의학이라는 담론을 인정하는 일은 과학(지식)과 권력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신체 역시 포섭한다. 봉건사회와 달리 근대 유럽 사회에는 개인의 신체를 감시하고 조련하기 위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42쪽) 학교와 군대의 규율, 공장을 비롯한 작업장의 노동이 이런 신체 훈련과 감시 강화와 더불어 나타났다. 푸코는 신체의 ‘생산성’ 촉진이 바로 인문과학(인간학)의 역사적 조건이라고 본다. 또한 현대의학이나 정신병리학도 이 테크놀로지의 일면으로 파악한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의 신체는 분열되었다. 신체는 경제적으로 과대평가된 동시에 정신적으로 멸시받는다. 이는 기독교가 ‘신체’와 ‘성’을 대상으로 하나의 ‘권력 기술’을 도입하면서 나타난 분열이다. 기독교는 신체나 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기보다 ‘신체’와 ‘성’을 통해 권력을 조직했다. 이 책에 언급된 ‘목자=사제형 권력(사목 권력)’이 그 형태이다. 통념과는 다르게 우리가 ‘주체’라고 불렀던 무엇도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다. 푸코의 철학은 ‘주체의 해체’라는 이전 혹은 동시대 철학자들의 작업을 기반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푸코는 근원적이거나 자명한 ‘주체’라는 개념을 믿지 않으며, 니체와 마찬가지로 다른 방식으로 ‘주체’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다. 그 작업은 푸코가 이 대담을 진행한 후에 주로 이루어졌다. 말년의 푸코는 기독교의 규율과 불교의 규율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일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기 기술’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대담은 철학과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논의로 마무리된다. 와타나베의 표현에 따르면 푸코는 철학자를 ‘특수성’의 지식인으로 본다. 철학자는 ‘보편성’의 지식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기보다 시점을 비틀어서 사람들이 놓치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푸코에게 지식인은 합리성을 구축하려는 ‘철학’의 무대가 ‘연극’과 마찬가지로 허구의 공간이라는 점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