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취투북] <노자가 옳았다> #3 -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2021-01-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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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냄비 속의 개구리를 두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삶아 죽을 때까지도 점점 뜨거워지는지도 모른다고.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보지도 않았고, 그런 실험을 할 생각도 없었으니.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인간이 그 냄비 속의 개구리와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보곤 한다.


역사를 보면 과거 사람들의 선택이 어리석게 보일 때가 있다. 커다란 변화 가운데 낡은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던 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헌데 2021년을 사는 우리라고 얼마나 다를까.


무엇인가 커다란 변화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변화가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알 수 없다. 미래는 여전히 깜깜하다. 한 1년을 예외적 상태로 살았더니 이제는 이 낯선 일상을 나름 받아들이며 지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훗날, 한 2~300년 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과거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은 역사를 진보의 현장으로 바라보는 관점 때문일 테다. 미래가 과거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 아니 나아야 한다는 당위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진보'라는 개념은 전통사회 중국인들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설사 시대 일부를 떼어 이전보다 나아졌느니 못해졌느니를 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역사 전체로 볼 때엔 또 하나의 변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역사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말한다. 역사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요? 그냥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텅 빈 장이지요. 텅 비었다니요? 아하!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겠군요. 그 텅 빈 장에는 혼성의 카오스가 서왈원逝曰遠,원왈반遠曰反하고 있겠군요. 왔다갔다 어슬렁거리고 있겠네요. (263쪽)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도올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노자>의 평화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국민개병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비판하는 부분(287쪽)은 적잖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노자는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또 현실주의자이다."(286쪽) 저자는 국가의 존재,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나타난 전쟁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그 이유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국가와 군대라는 '현실'에서 바로 '국민개병제'라는 또 다른 현실이 바로 이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통렬한 비판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보'라는 가치가 19세기, 20세기를 지배했던 상황에서 그의 비판은 곱씹어 읽을 필요가 있다. 진보에 대한 조바심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낳았는가. 


당연히 이러한 우주에는 시작(창조론)도 없고 끝(종말론)도 없다. 반返만 있을 뿐이다. … 럿셀 경이 말하는 "상상력의 빈곤"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시간에 대한 몰이해, 25장이 말하는 도(길)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260~261쪽)


변화와 흐름, 생성으로 세계는 움직인다. 여기서 가장 으뜸인 가치는 이 흐름 그 자체일 것이다. 단절 없는 연속적 세계의 역동적 움직임. 도올은 이를 "왔다갔다 어슬렁거림"이라고 말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표현이다. 


하나의 세계. 이 세계는 과거로부터 형성되어 미래로 뻗어나가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가 포개져있는 그런 세계이다. 생사生死도 마찬가지이다. 어디로부턴가 태어나 이 땅에 살다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식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듯 죽음이란 '돌아감'이며 "이 '돌아감'은 종료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213쪽)" 


마왕퇴에서 출토된 비의非衣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옷에 새겨진 그림, 천상과 인간세, 지하를 묘사한 이 그림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저자의 말처럼 고대 사람들은 천상, 인간세, 지하가 모두 하나로 소통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일방적인 방향성은 없다.(199쪽) 선한 인간이 하늘로 들어 올려지는 일도, 악한 인간이 지하로 떨어지는 일도 없다. 


이 세계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자연自然'이라는 말을 선물해준 것은 <노자>의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듯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하나의 명사로 생각한다. 나아가 문명과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한다.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자연이라는 뻔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최초의 오해의 관문은 바로 "자연"을 명사화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 "자연"은 "네이쳐Nature"라는 서양언어의 번역텀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인위적 문명의 건설공간에 대비되는 "녹지대green belt"를 말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언어 속에서 자연은 실상 "녹지대"일 뿐이다. 그러나 중국경전에서 나오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그렇게 쓰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일 뿐이다. (220~221쪽)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바람과 풀, 나무와 시냇물 따위를 떠올리지 말고. 아마 고대인들이 자연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이 세계의 변화 자체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확대해서 말한다면 바로 역사가 자연이기도 하다. 전진이나 후퇴가 없는, 진보나 퇴보가 없는 흐름이 자연 아니겠는가. 


서양인들은 하나님, 초월자로부터 세계가 창조되었다 생각했다. 창조된 이 세계는 언젠가 종말할 테다. 종말이건 재림이건, 이 역사는 늘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이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흐름이 있을 뿐이며, 무심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선善을 향하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으며, 악惡으로 굴러 떨어지지도 않는다. 설사 어디론가 향하는 듯하여도 이는, 저자의 말처럼 "왔다갔다 어슬렁거림"일 뿐이다. 


물론 한 개인의 삶에서 전진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런 것들이 제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누군가는 진보의 조급함을 이야기할 것이고, 누군가는 퇴보의 두려움을 이야기할 것이다. 더 나은 사회로 가야 한다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자고 호소할 테고, 이렇게 사회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분기찬 목소리로 소리칠 것이다.


역사, 이 흐름을 사는 존재로 개인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 걸까? 조금은 무심한 눈으로, '자연'의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사는 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변화가 닥쳐오고야 말 것이라는 점이다. 싫다고 막을 수도 없고, 좋다고 반길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면 그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답하지 않을까 싶다. 크게 나아진 것도 없고 크게 나빠진 것도 없다는 뜻에서. 한편 이 말은 열망에 사로잡혀 애쓰며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는 뜻도 아니며,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헤매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조금은 무심하게, 그러나 나름의 길을 조금씩 찾아가면서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그런 욕심이 들기도 한다. 더 그저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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