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오드리 로드Ⅱ<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다양한 여성들로 살아가기 위해>
정체성의 정치, 차이를 단순한 대립관계로 보는 편협함에 대하여 서구철학의 역사는 차이를 단순한 대립관계로만 이해한다. 차이를 단순한 대립관계, 이분법적인 관계로 보는 사고는 차이가 가진 생산성을 보지 못한다. 차이에 대한 이런 사고에는 ‘주체는 동일하다’라는 전제가 있다. 이 동일성의 철학, 정체성의 철학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완벽한 조건이라는 식의 이상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하나가 없으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차이에 대한 왜곡된 이해 정체성의 정치에 깔린 이분법은 억압받는 자들의 대상화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흔히 주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비주체로 마음대로 규정한다. 이러한 대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주체가 되려고 하는 역량을 꺾어버린다는 것이다. 억압자들은 이 대상화 된 집단을 완전히 분리된 삶들로 생각해서 그들을 멋대로 불행하다고 판단해버린다. 오랫동안 소수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경계하고, 억압자들의 언어와 태도를 따라해야 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억압자들에게 그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이 실수인지마저 가르쳐줘야 했다. 하지만 차이의 정치는 남을 설득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다. 차이를 차별로 만들고, 차이를 대립이라고 생각했던 소위 동일한 주체들이 사실 자기도 하나의 차이 나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이 차이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차이를 분열로 만드는 건 차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특권을 인식하고 함께 존재하기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나이 차별, 이성애 중심주의, 엘리트주의등은 차이에 드리워진 왜곡된 생각들이다. 우월한 자들은 우월성을 정상성이라고 말하고 ‘모든 인간’이라고 호명한다. 우월한 자들은 자기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특권에 따른 이익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차이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설명할 때 자신의 문제점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자기의 역량을 길러내는 것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 인간이 지닌 다양한 차이와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억압의 구조를 파헤치기 여성운동들이 착취와 억압의 구조 안에 있는 건 여전하다.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들을 ‘모든 여성’의 것으로 요구하면, 실제로는 모든 여성들의 요구를 쟁취할 수 없다.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여자들까지 포괄되었을 때 우리가 ‘모든 여성’이라고 호명할 수 있다. 목적을 실현했다고, 페미니즘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강간하지 말아라’ ‘여성을 대상화하지 말아라’ ‘임금은 평등해야 한다’ ‘양육을 같이 해야 한다’ 이런 요구들은 근본적인 요구라는 점에서 레디컬하지만, 만약 그 요구로 끝날 경우에 그것이 레디컬한지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더 근본적으로 래디컬해지려면 ‘차이’가 있어야 한다. 억압의 구조를 멈추려면 특권을 인식하고, 차이를 성장시키고, 차이를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
근대 주체의 환상과 굴레 근대주체의 환상이 있는데 첫째, 정신하고 신체는 완전히 구별이 되어 있고, 정신이라는 건 신체랑 구별된 채 어떤 이성 능력이 선천적으로 있다거나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한테 굴레가 될 때가 많다. 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고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세계가 아무리 나한테 적대적이어도 나는 자유의지를 갖고 극복할 수 있다는 신화들만들어 내고 내가 나를 잘 연마하고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는 식의 위대한 개인 서사를 만든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이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두 번째, 이성과 신체가 구별되었다는 생각.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니까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합리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까지 사회화된 많은 내용들은 배워온 것이고 정보로 주어진 것들이 우리 몸에 체득된 것이다. 그 사회는 바로 동일자가 이야기하는 규범세계이다. 근대가 만든 주체라는 환상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굴레라는 것을 깨닫고 감정을 무시해야 될 것,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원이라고 여겨야한다.
분노와 혐오의 방향 바꾸기 내가 나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할 때 자기와 가까운 존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고 이 분노는 혐오가 된다. 분노는 잘 활용하면 외부에 균열을 낼 수도 있지만, 혐오는 파괴적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혐오, 혐오를 지속하는 사회, 혐오를 용인하는 사회, 혐오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는 현실들에 대해서 분명히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혐오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살게 하는 힘이고, 우리가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해주는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서로 바라봐야한다.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페미니즘의 윤리적 전회 페미니즘은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들과 거기에 필요한 중요한 가치들을 제안한다. 하나는 차이와 타자성의 존재고 또 하나는 연결성, 관계성이라는 윤리적 가치다. 분노와 혐오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왜 분노와 혐오가 발생하는지 알아야한다. 그 방향을 전환했을 때 그 에너지가 바뀔 것이다. 페미니즘의 이해를 거쳐 자신의 경험에 자긍심을 느끼고,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또 다른 경험을 통과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어를 거쳐낸 경험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서로 다른 차이를 지닌 이들이 서로의 차이를 말하고, 그 말하기를 통해서 언어를 얻고 자긍심을 갖는 과정이 함께 가야 한다.
어머니되기 우리 자신을 관대하게 돌보는 태도들이 결국 우리 안에 있는 혐오와 분노를 다른 식의 알고리즘으로 변환시킬 것이다. 이 마더링이 혐오나 분노라는 힘들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스스로를 돌보는 페미니스트, 여자들 우리가 동일함으로써 구조와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수자들 혹은 차별하는 사람들이 규정하는 딱지로부터 벗어나서 나 자신을 규명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관대함을 갖고 서로의 힘을 북돋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동질성을 통해서 연대를 마련하려고 하는 그 오래된 습관은 어떤 순간 고립주의를 자처하게 될 수 있다.
제 2물결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여성들 간의 차이를 발견했다. 차이를 차별이 아닌 존재론적인 힘,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우리 존재를 새로 만들어내는 힘으로 여기며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가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