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인종이나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장애, 직업 등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이유가 돼선 안된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주된 의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스티븐 프라이나 조던 피터슨 또한 이런 점엔 동의한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은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해 정체성 정치가 나타나고, 정체성으로 인해 집단이 생성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과 주디스 버틀러가 다른 점은 개인의 정치성에 있다. 버틀러는 정체성이 없어진다고 정치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로 인해 정체성의 경계는 무너지면서도 정치성은 더 생생히 살아있게 된다. 반대로 조던 피터슨은 정체성 집단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정치성도 없애려 한다. 그는 개인에게서 정치성을 빼내기 위해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허나 조던 피터슨이 혼자 철학의 대가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티븐 프라이의 주장을 보자.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소위 피씨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피씨한 사람들은 빻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경멸을 쏟아낸다. 대한민국과 같은 혐오사회에선 피씨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쏟는 분노보다 혐오를 내뿜는 사람들이 소수자들에게 쏟는 분노의 양이 훨씬 클 것이지만, 이와 별개로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도덕적 진리가 되고, 언어를 검열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그러나 난 이것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이론이 가진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이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이 현재의 기준으로 정해진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진리로 보느냐, 아님 끝없이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이론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정치적 올바름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태도도 바뀌지 않을까?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질문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진다. 그들은 이 물음에 답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을 점점 넓힌다. 그들에 의해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이 계속 넓어진다면, 결국엔 각자가 자신만의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합의해 갈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당장 퇴출된다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두 번째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전세계적으로 우파의 덩어리가 커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근거가 없고 몹시 순진하다. 일베는 모두 피씨한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이들일까? 일베가 생기고 커질 때 우리나라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 자체도 없었다. 트럼프가 피씨한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이들의 표를 받고 대통령이 됐을까? 이것보단 차라리 글로벌 자본주의로 인해 모든 생산 시설이 값싼 노동력을 가진 나라에 집중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그럴 듯 하다. 제 1세계가 제 3세계를 착취하는 구조는 정치적 올바름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아프리카의 자원을 착취하고 중국의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미국의 디자인과 기술력을 가졌다고 높은 가격을 받는 애플같은 기업은 정치적 올바름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애플이나 나이키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전세계적 우경화의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기업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등에 엎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어느샌가 피씨하다면 애플을 쓰고, 피씨하다면 나이키를 신어야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무작정 애플과 나이키를 제외하고 삼성과 아디다스를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더 나빠보인다. 착취는 똑같이 하지만, 피씨하지는 않으니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본 한 다큐는 아프리카를 착취하지 않고 만든 핸드폰을 소개했다. 그러나 내가 과연 아이폰 대신 그 제품을 선택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