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제1부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제안하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개혁의 토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경로에 대한 다른 시각을 포착한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전면적 붕괴와는 멀어질 거라고 보았다. 자본주의의 적응능력과 생산과정의 다양한 분화를 믿었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이 꼽은 자본주의의 적응능력은 신용체제와 기업·조직의 발전,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정보서비스의 발전이다. 생산과정의 분화와 함께 프롤레타리아가 중산계층으로 상승하며, 노동조합 투쟁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정치적 지위도 상승하리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적 통제의 점진적 확대 혹은 협동조합 원리의 점진적 실현을 통해 사회주의 도입을 지향한다는 게 사회민주주의의 일반적 지침이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견해가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을 비롯해 다른 사회민주주의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로자는 이를 부정한다. 로자가 보기에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로의 이행 자체를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 질서의 내적 모순으로 인한 붕괴가 사회주의 이론의 근본 주장이라면 베른슈타인은 이 붕괴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을 거라고 보면서 왜 베른슈타인은 (변형된 형태의)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들먹이는가? 더 이상 역사적 필연성으로 제시되지 않는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자기 방식대로 추측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곳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로자는 엉성하고 두루뭉술한 베른슈타인의 견해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자세히 서술한 내용들만으로도 엉성한 견해들은 쉽게 반박된다. 궁금한 점은 베른슈타인이 맑스를 읽지 않은 것도 아닌데, 자신의 견해가 허술하다는 사실도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 알았을 테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각성을 촉구하면서도 노동조합 통제와 공장법 개정을 촉구하는 베른슈타인이 일부러 쉬운 언어를 골라 연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다. 베른슈타인의 연설은 잃을 것이 있는 중산층 노동자를 향한다.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혁명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활동에 매진하면서 살아가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멀어질 거라는 감언이설이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적응능력 중 하나로 꼽은 신용체제는 무모한 축적을 통해 위기의 도래와 확대를 쉽게 한다. 주식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신용은 소유권의 개념 자체를 바뀌게 만든다. 이제 공장의 주인은 공장주도, 노동자도 아닌 주주이다. 소유권 형태의 변화는 소유관계와 생산관계 간의 모순을 심화시킨다. 카르텔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희석하지 못하며,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자본의 무정부성을 심화시킨다. 세계시장은 제한되어 있고, 생산력의 발전은 언제나 시장의 한계를 넘어선다.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소자본은 늘 틈을 비집고 새로운 영역에서 생산방법을 선도하다가 점차 대자본에 잠식된다. 맑스는 소자본의 발흥이 계속되지 않으면, 생산의 창조적 생명력이 소진될 거라고 보았다.
로자는 20세기 초반의 당시 사회가 아직 자본주의의 성숙기에 접어들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떨까? 세계화와 기술진보 상황을 통해 짐작해 보건대, 성숙할 만큼 성숙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노동조합, 사회개혁, 그리고 국가의 정치적 민주화이다. 로자는 이것들을 통해서는 자본주의적 착취가 절대 사라질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시장은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수요와 공급, 노동생산성 정도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기술 혁신이 노동자의 상황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반대한다면, 노동조합은 반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노동의 종말’을 바라보는 21세기에 로자를 통해 읽는 노동조합의 쇠퇴기는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로자는 국가의 신비화 역시 경계한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를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수단으로 의회나 국가를 보면 안 된다. 오늘날의 국가는 계급국가이다. 부르주아의 정치적 승리와 함께 국가는 자본주의적 국가가 되었다. 국가와 밀접한 관세나 군국주의는 자본가계급에게 필수적이다. 다른 민족 집단과 경쟁하는 ‘민족’ 이해관계의 수호를 가능하게 하고, 노동계층에 적대적인 자본의 지배를 위한 도구로 꼭 필요하다. 한편으로 이 국가중심의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병리현상이기도 하다. 국가의 이런 변화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부합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 속에 있는 모순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다. 형태가 민주주의적 제도일지라도, 내용에서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된다. 제정시대를 살았던 로자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은 지금 읽어도 예리하다. 로자는 단언한다. 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가정처럼 사회주의의 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적대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자본주의 특유의 수단이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조합의 투쟁이 사회에 사회주의 성격을 각인시키고 사회주의적 변혁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실천적인 일상활동은 사회주의와의 관련성을 궁극적으로 상실한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자들을 선동하며 말한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운동 자체에 경향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사회개혁이라는 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로자는 여기에 반대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최종목표를 상실한 투쟁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회개혁은 목표가 아니며, 연속된 개혁들이 사슬처럼 이어져야 한다. 사슬은 금방 끊어지며, 운동이 취하는 노선도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그때는 온갖 수단을 다해 다음의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옮겨야 한다.
로자는 쉽게 장밋빛 전망을 내놓지 않는다. 사회개혁의 지난 결실들을 돌아보면 언제나 공허했기 때문이다. 언제든 사회개혁에 대한 환멸이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의 일상 투쟁에 경향으로 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과, 사회변혁을 통한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목표로 노동자계급의 주관적 인식에 내재할 뿐이다. 당연히 혁명은 모순이 심화되고 성숙하기를 기다린다. 반면에 모순의 완화를 원하고 거기에 의존하는 베른슈타인에게서 나타나는 관점은 개별 자본가의 관점이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개별 자본가의 눈을 통해 본 경쟁을 자본주의 전체 경제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반동의 자세는 결국 유토피아로 귀결된다.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의 퇴락으로 인한 유토피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