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미학》 서론, 제1부 ‘바깥’의 예술론
문학비평을 포함한 푸코의 예술론은 대부분 전기의 활동에 집중되어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푸코의 관심사와 연구는 예술과 멀어지는 듯 보인다. 특히 후기에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자기 돌봄과 윤리의 문제에 집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조금 집중해서 보면 푸코가 여전히 미학이라는 용어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푸코에게 미학의 대상은 실존 그 자체이다. ‘실존의 미학’을 추구하는 푸코의 이념은 ‘삶의 예술작품화’이다. 미학이라는 주제에서 멀어진 게 아니라 오브제의 변경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푸코의 사유를 하나의 일관성으로 구축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1960년대 푸코의 예술론에서 중요한 단어였던 ‘바깥’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푸코의 스타일을 살펴볼 필요는 있겠다. 전기의 푸코는 블랑쇼나 루셀의 글, 마네와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어떤 도드라짐이나 단절을 포착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나 사드의 글,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도드라짐이나 단절을 푸코가 블랑쇼론에서 언급한 ‘바깥’의 연속이라 본다면, 푸코는 예술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왔다고 볼 수 있다.
‘바깥’은 문학에서 주체가 ‘비존재’로 되는 공간이며, 주체의 한계가 드러나 마침내 소멸되는 공간이다. ‘바깥’이라는 공간은 분명히 담론 밖에 존재하지만, 담론 안에서만 말하고 사유하는 우리는 바깥에 대해 말하고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깥’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재나 공백으로만 나타난다. ‘바깥’은 우리의 한계이다. 담론의 한계지점, 우리 표현의 한계, 우리 사유의 한계이다. 한계는 끝이 아니다. 하나의 테두리일 뿐이다. 우리는 ‘바깥’이라는 한계, 테두리를 통해 우리가 담론 안에서 존재하고 사유하며 표현하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바깥’은 위반을 통해 드러난다. 위반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성스러움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의 신성모독은 성스러움을 ‘공허한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푸코는 바타이유의 위반을 통해 주체의 붕괴를 감지한다. 주체가 ‘바깥’이라는 공간을 깨닫고 언어로 표현하려는 순간, 주체는 자신의 언어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공허 속에서 주체들은 서로 연결되고 분리되며, 서로 결합되고 배제된다. 푸코는 여기에서 “철학적 주체성”의 붕괴를 목격한다. 언어가 내부로 산산이 흩어지고 증식하는 과정. 푸코는 이 붕괴에서 “현대 사유의 기본 구조”를 확인한다. ‘철학의 언어는 주체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계에 이르기까지 그 상실을 체험하기 위해 나아간다.’ (46쪽)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 집중하는 지점은 가시성의 영역이 아니라 비가시성의 영역이다. 회화는 재현하는 이와 재현되는 대상의 단절을 전제로 완성된다. 벨라스케스가 이 전제를 무시하고 한 작품 안에 재현하는 이와 재현되는 대상을 모두 담으려고 했을 때, 작품 안에 분명히 명시되는 것은 양립불가능성의 “본질적인 공허”이다. 벨라스케스는 그 공허를 직시하면서, 회화의 한계를 실감한다. ‘바깥’은 가시성이 아니라 비가시성을 통해 체험되고, 세계의 암묵적인 전제를 위협하고 조롱하면서 우리를 공허와 맞닥뜨리게 한다.
푸코가 마네와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발견하는 ‘바깥’은 혁신성으로 연결된다. 마네는 회화를 3차원처럼 보이게 하는 재현방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르네상스 이전으로 돌아가서 캔버스의 물질성을 재도입한다. 푸코는 이 캔버스의 물질성을 재현의 내부에 출현한 ‘바깥’으로 본다. 이 ‘바깥’이 재현의 한계를 드러내고, 회화가 현실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회화 안에서 반복되는 시뮬라크르의 공간을 연다. 한없이 계속되는 반복은 유사성을 확인지 못하게 만들어 회화를 ‘닮음’ 자체에서 해방시킨다. 점차 넓어지고 증식하는 공간은 재현 자체를 붕괴시키면서 회화 안에서 재현 대신 ‘바깥’의 공간을 열어버린다.
‘바깥’은 재현의 작용을 벗어나면서, 재현을 관장하는 통일적 주체의 해체를 확인한다. 문학에서 이 점이 두드러진다. 푸코는 블랑쇼를 ‘문학의 바깥’이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문학의 바깥’은 도서관으로 볼 수 있다. 도서관은 분류·정리되고 잘라내고 조합하고 반복되는 하나의 공간이며, 이미 말해진 것들이 반복되는 장소 없는 장소이다. 도서관은 다양한 기호 사이에서, 책에서 책으로 반복되는 이야기와 주석의 문제 속에서 확대된다. 다양한 텍스트 사이에서 생겨나고 성장하는 것이 바로 도서관의 형상이다. (58쪽) 도서관은 저자의 외부에 "이미 쓰여 있는 것“으로 존재하면서, 그물망을 형성한다. 저자의 창작활동은 이 문서고에서 탈출하면서 성립되며, 그 후에는 다시 문서고로 돌아간다. 예술에서 ‘바깥의 사유’란 문서고의 절대적 선행성를 전제한다는 말이다. (62쪽)
문서고의 선행성을 전제하고 나면, 진리와 미라는 개념의 지위도 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아닌 ‘담론들의 일관성’ 속에 있으며, 미가 아닌 ‘형태들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 있게 된다. 과거의 저자들이 익명성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고민했다면, 이제 문제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담론의 거대한 익명적 속삭임 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깃들게 하는 것”이다. (63쪽) 새로운 글쓰기 형태 앞에서 푸코는 저자를 새롭게 다시 정의하고 있다. 저자란 이제 담론의 외부에 있는 현실의 개인이 아니다. 저자는 픽션의 경계를 획정·배제·선별하는 기능이며, 의미작용의 무한한 원천이 아니라 의미의 증식을 제한하는 존재이다.
푸코는 광기와 문학의 인접성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광기를 위반의 경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바깥’의 예술은 이성의 영역에서 배제된 광기의 영역에 속한다. 푸코가 루셀의 언어공간에서 확인하는 것은 “언어의 본질적이고 놀라운 가난함”이다. 푸코는 이 언어의 가난함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 풍부한 관계성을 산출한다는 역설적 사실에 주목한다. 또한 말은 한번 내뱉어지면 사라지지 않고 현실성을 가진 채 누적된다. 놀라운 일은 다양한 사실들이 말해진 후에 더 이상 똑같은 존재양식, 그것들을 에워싼 것과의 관계들의 똑같은 시스템, 똑같은 사용 도식, 똑같은 변형가능성들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적되는 언표들은 서로 늘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관계를 맺는다. 언표는 인식주체와 관계없이 익명으로 반복될 수 있다. 루셀은 자신을 그런 익명의 주체 중 하나로 보았다.
푸코가 루셀에게서 주목하는 점은 작품 제작의 독특한 방법뿐만이 아니다. 루셀은 실제로 그 방법대로 자신의 삶 자체를 바꾸었다. 푸코는 예술 속에서 담론의 질서와 사유의 구조를 확인했으며, 삶의 방식을 발견하기도 했다. 푸코가 쓴 예술론들은 단순한 ‘비평’이 아니라 예술 속에 있는 변혁의 힘에 대한 인정이었다. 또 ‘위반’을 통한 변화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광기가 가진 위반의 힘을 폐쇄적인 글쓰기 형태에서 발견하려 했던 푸코의 작업은 점점 활기를 잃어간다. 소통이나 가치에 의미를 두지 않는 문학 작업들이 사라지면서 에크리튀르의 전복적 기능이 존속하는지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탓이다. 68년의 혁명과 맞물리면서 푸코의 관심사는 현실로 옮겨가게 되었다. 푸코가 예술이 가진 변혁의 힘을 불신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후 푸코의 미학은 구체적인 예술작품이 아니라 실존 자체를 향한다. ‘바깥’은 이제 실존에 전복과 변혁의 힘을 부여하는 미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