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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시사] 살아가려는 자는 하나의 이름을 깨뜨려야 한다: 0718 발제2019-07-1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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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후지이 다케시의 글을 읽고 나서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본다. ‘살아가려는 자는 하나의 이름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의 이름을 부수기, 고유명사의 해체. 고유명사와 주어의 허상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과 분리된 어떤 존재가 된 것처럼 느낀다. 나약하고 고독한 개인이라는 형상이 그렇게 나타난다. 사회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 고독을 운명처럼 여기다 보면, 현상을 유지하기에만 골몰하게 되고 선을 넘는 일은 위험하고 불가능하게만 여겨진다. 선을 넘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름을 부수는 일이 필요하다.

 

이름이 언뜻 우리에게 부여된 권리의 원천처럼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권리들은 우리를 예비노동자로 예속시킨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예비노동자에 걸맞은 습속을 익히도록 하며, 더 나은 노동력을 생산하도록 돕는다. 사회의 각 영역이 공장의 각 부분처럼 자본주의가 유용하게 움직이도록 기능하고 있다. 자본가가 지시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양질의 노동력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가사노동은 가정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재생시키고, 여성의 출산은 노동자를 재생산한다.

 

학교생활과 가사노동으로 인한 이 재생산비용을 자본은 부담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학교와 가사노동이라는 대가없는 노동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자본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뿐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노동자들은 경쟁을 통해 본의 아니게 다른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거나, 가정 내에서 가사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정규직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갈등, 시험에서 통과해 경쟁에서 이겼으니 자기 자리를 넘보면 안 된다는 정규직 노동자의 태도는 그렇게 형성된다. 남성 카르텔을 통해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제하고, 여성을 가정 내에 머무르게 하면서 무급노동자로 이용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 전에 우리가 무구한 피해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데미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무언가를 거기서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 역시 가해자임을 깨닫지 않고서는, 연속되는 가해의 충동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름을 부순다는 것은 고독하고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고정된 자신을 깨뜨리는 일이다. ‘명백한 피해자’ 혹은 ‘절대적으로 옳고 선한 자’의 허상을 스스로 깨뜨리고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다. 확고한 주체는 ‘주체 없음’과 대립하지 않는다. 주체의 해체는 곧 새롭게 구성되는 주체를 의미한다. 고유한 이름을 부수고 무명으로 존재한다는 것. 살아가려는 자는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깨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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