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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양철학사2] 제 13장 계몽주의 - 이성과 진보2021-03-1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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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계몽주의 - 이성과 진보

 

 

1. 근대화와 과학

영국은 의회대의제를 통해 통치체제를 효율적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반면,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다.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제도의 공백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18세기 초 프랑스 지식인들(계몽주의자들)은 로크의 자유주의와 뉴턴의 새로운 과학을 이상으로 삼아 영국 사상들을 대거 수입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렇게 사회변화와 과학적 진보와 연관되어 있다. 영국왕립협회와 같은 과학협회, 과학저널, 백과사전 등이 출간되고,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들이 근대화되면서 학문이 발전했다. 특히 인문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20세기가 다가오면서 경제 행정 사유 태도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현실이 달랐다. 영국은 개인에게 일정한 불가침의 권리들이 존재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개인의 권리에 대한 사상이 추상적이고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크의 인권 개념을 수입하는데, 인권 개념은 절대왕정에 대한 공격으로 작용했다. 실제 프랑스인들은 절대왕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더 계몽되고 효율적인 절대왕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현실에 뿌리박은 보수주의와 상식적 개혁주의가 혼합된 영국사상은 프랑스 들어와서 격렬하고 비판적이었다. 프랑스의 계급적 차이가 영국보다 더 화해 불가능한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교회와 귀족, 성직자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 힘은 약화되었고, 국왕의 권력은 비효율적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영국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절대왕정과 귀족의 전통적 특권에 맞서 싸운 이들이 상인 계급인 부르주아지이고,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인권개념과 로크의 자유주의 그리고 뉴턴의 자연과학이었다.

 

 

계몽철학자들은 전통에 대항하여 이성을 내세우고, 이성의 도움으로 행복과 물질적 진보를 이루기를 희망했다. 계몽주의 철학의 기본요소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것, 인간 삶의 목적은 지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고, 이 목적은 과학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지와 미신과 불관용은 목적 달성의 장애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아니라 계몽으로, 계몽할수록 인간은 더 도덕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성개념은 너무 모호했다. 진보를 실현하는데 부딪칠 정치적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2. 세속적 행복

계몽을 통해 세계는 진보할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절대군주나 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적인 주도권과 사유재산권을 보호받기 위한 중간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유용한 결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계몽주의 철학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공리주의는 하나의 행위가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는 만큼 옳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공리주의는 주로 부정적 가치들에 집중한다. 쾌락을 찾는 것보다 고통을 막아내는 데에 관심을 갖는다.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공리주의는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공리주의자들이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객관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다.

 

 

3. 몽테스키외 - 권력분립과 환경의 영향

몽테스키외는 환경과 법의 표현 간의 상관관계를 경험적 방식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의 작은 기후, 토질, 무역형태, 생산방식, 관습이 정치와 법 제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정확한 직관에 의존했다. 그는 영국의 통치 형태인 군주정을 프랑스의 이상으로 보고 영국의 제도와 자유를 옹호했다.

 

 

권력분립 이론은 플라톤의 [법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이어 오래된 생각이다. 중세의 제국들과 로크의 사상에 이어 법률가였던 그는 이 이론을 발전시켜 권력들간의 합리적 균형에 적용했다.

 

 

4. 엘베시우스 - 개인과 쾌락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을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엘베시우스는 실제로 인간은 고통을 회피하는데, 이것이 선이라고 전제했다. 인식론적 경험론자라 할 수 있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할 토대는 없었다. 계몽사상가 엘베시우스는 자기 이익이 가장 중요하고, 각각의 사람이 쾌학()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모든 이에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원칙에 입각하여 8시간 노동제를 제안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쾌락의 극대화였는데, 어떤 행동이 개인들에게 주는 결과의 유용성에 달려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자다.

 

 

1700년대 들어서면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견해가 등장한다. 문학 살롱의 관심사도 시에서 과학기술로 바뀌게 되었다. 산업사회가 작동하려면 지식인 집단이 어느 정도 기술적 진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살롱들의 관심사가 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계몽철학자들은 계몽(진보에 대한 믿음)이 물질적 진보와 복지를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이러한 진보 신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타격을 입으면서 1700년대 계몽주의의 진보적 낙관주의도 사라졌다. 1700년대 말 새로운 중간계급이 서구 유럽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5. 경제적 자유주의

벤담은 인간간의 기본적 동기로 쾌락을, 스미스는 경제적 생활의 동기를 자기 이익이라고 보았다. 스미스의 경제적 개인주의는 인간과 사회제도 및 권력구조의 비합리적요소들을 무시한다. 모든 경제활동을 경제적 원자론(자유주의)로 설명하는 그의 이론은 경제적 인간의 게임이론으로 발전하여 고전 경제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스미스는 자연가격이론(수요공급의 가격이론)과 공정가격이론을 제시한다. 이 두 이론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갖는다. “스미스의 문제는 경제철학과 도덕철학을 조화시키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후에 위르겐 하버마스에 의해서 체계생활체계의 관계 문제로 이어진다.

 

 

리카도와 맬서스는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방임 자유주의를 강화했다. 스미스는 자유롭고 자연적인자본주의가 모든 계급에게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한 반면, 리카도와 맬서스는 식량과 인구 증가에 대한 경향성이론을 근거로 노동계급의 빈곤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사적 자본주의를 묘사하면서 임금이 최저생계비로 향하는 경향은 자연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터무니없는 자유방임 이론은 자유주의의 절정이었다.

 

 

6. 루소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은 1700년대에 성장하던 프랑스 시민 계층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자들이 이념으로 사용한 개인과 이성 그리고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에 반대했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은 당시의 낙관주의에 회의를 갖게 했다. 회의론자 볼테르가 그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루소가 나이 서른 무렵 파리에서 볼테르를 만난 적이 있다. 루소는 이성의 함양이 아닌 감정의 함양을, 자기 이익이 아닌 공동체와 일반의사를 찬양했고, 진보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인간은 선하다는 계몽철학자들의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가졌다. 계몽철학자들은 악은 전통과 특권에 의해 조장된 무지와 불관용에서 나오고, 루소는 문명과 과학이라고 했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사 이론은 제도이론을 결여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고 제도를 소홀히 하는 유기체적 사회 이론은 비합리적이고 낭만적인 공동체 숭배로 귀결된다. 그래서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그의 생각은 히틀러나 레닌을 미화하는 것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루소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흐름에는 종교와 도덕성을 옹호하는데 철학을 이용하는 경향이, 루소에서 출발하여 버크와 헤겔을 관통하는 철학적 노선에는 공동체와 개인을 상호 연관된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다. 홉스와 로크를 거쳐 1700년대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의 개인주의는 개인을 완전히 발전된 사람으로 고 국가는 단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루소는 인간의 능력이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완전히 발전된 인간은 사회-속의- 시민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소가 말하는 사회란 작은 사회, 즉 제네바와 같은 도시국가이다.

 

 

공동체는 또한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 간의 연대는 이윤과 쾌락에 대한 피상적 계산이 아니라 뿌리 깊은 감정과 태도라는 것이다.

루소에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가족과 지역공동체이다. 개인, 민족, 셰계는 추상일 뿐이다. 루소의 이러한 사상은 보수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공동체적 유대와 연결된다.

7. 에드먼드 버크 - 보수적 반동

버크는 프랑스 혁명 동안에 프랑스 시민계급의 급진주의에 반발하는 반동적 움직임을 대표한다. 그는 흄의 이성 비판과 자연권 사상 비판, 그리고 루소의 계몽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다. 흄처럼 그는 감정과 습관과 관습을 이성과 대립시킨다. 루소처럼 공동체를 개인주의와 대립시킨다. 역사와 전통은 신성하고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혁명과 사회개혁에 반대하고, 온건한 정치 개혁만 인정한다. 전통은 그 자체로 가치와 지혜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는 형식적 보수주의자가 아닌 가치 보수주의자였다.

 

 

가치보수주의는 사회가 복잡해서 우리는 사회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버크의 주장과 같다. 그는 사회와 역사는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감정과 선입견도 불충분한 이성만큼이나 신뢰할 수 있다는 비합리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사회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견해는 정치적 수동성을 초래할 수 있다.

정치적 수동성의 경향은 간접적으로 특권층과 자본의 자유로운 발전을 옹호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가치보수주의의 정치적 결과는 같을 수 있다.

 

 

가치보수주의자들은 현존 문화에 대해서 옹호하는 태도를 취한다. 동인도 회사에 대한 버크의 비판이 그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유지하면서도 하위 사회계층들을 배려하는 봉건영주의 의무감을 가졌다. 버크에게 이런 가부장적 태도는 보통선거권을 지지하지 않고, 세습 권리의 철폐도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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