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요유> 앞부분 번역입니다. <장자익>에 실린 곽상주까지 번역했습니다. 역시나 초역본을 검토하는데 틀린 부분이 많네요. 장자 원문은 이야기체로 옮겼고, 주석은 논리에 따라 순서를 바꾸거나 의역한 부분도 있습니다. 장자 원문은 일단 제 관점에 따라 풀었습니다. 곽상 주석 및 다른 주석과 참고하여 따로 수정본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으나... 또 그런 작업은 나중에. * 원문을 뺄까 하다 그래도 '연구공동체'니 넣어두었습니다. 카세트 효과.. ㅎㅎ
소요유제일 逍遥遊第一
【郭注】 크고 작은 것에 차이가 있으나 자기에게 알맞은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물은 그 본성을 따르고, 일은 그 능력에 알맞게 된다. 각기 그 분수에 맞으면 똑같이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夫小大雖殊。而放於自得之場。則物仕其性。事稱其能。各當其分。逍遥一也。
【筆乗】 '소요逍遥'는 옛날에 '소요消揺'라 하였다. 황기복은 이렇게 풀이했다. '소消'는 햇볕이 비춰 얼음이 녹는 것과 같다. 비록 얼음이 녹더라도 그 본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요揺'는 배가 다니면 물이 출렁이는 것과 같다. 물이 출렁이지만 그 본질은 상하지 않는다. 세상에 노니는 것도 이와 같으니 오직 도를 체득한 사람만 가능한 일이다.
逍遥古作消揺。黄幾復解云。消者如陽動而冰消。雖耗也不竭其本。揺者如舟行而水揺。雖動也不傷其内。遊於世若是。惟體道者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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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아득한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은 곤인데,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지. 이 물고기는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이야.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가면 날개가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보여. 이 새는 바다를 뒤흔들며 아득한 남쪽 바다로 날아가. 아득한 남쪽 바다란 천지天池, 하늘의 연못이라 할 만한 곳이지.
<제해>라는 기이한 책에도 기록되어 있어. "붕이 남쪽으로 날아갈 때 물이 삼천리나 높이 솟아. 붕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까마득히 구만리를 올라가, 거기서 반년토록 쉰다고 해."
아지랑이가 하늘거리고 티끌이 날아다니며 살아있는 것들이 숨을 쉬지.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그게 본래 그 색깔일까? 아니면 까마득히 멀어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일까.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도 그렇겠지.
北㝠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徒於南冥。南冥者天池也。齊諧者志怪者也。諧之言曰。鵬之徒於南冥也。水擊三千里。搏扶揺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野馬也塵埃也。生物之以息相吹也。天之蒼蒼。其正色邪。其逺而無所至極邪。其視下也。亦若是則已矣。
【郭注】
곤과 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장자는 자유롭게 노닐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만족하는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고 지극히 큰 것을 가지고 본성의 분수性分에 어울리는 삶을 이야기했다. 도에 통달하고자 하는 선비는 비유에 주목하지 말고 핵심을 살펴야만 한다.
곤이 붕이 된다. 아득한 바다가 아니면 몸을 놀리기에 충분하지 않고, 구만리를 올라기지 않으면 그 날개를 펼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어찌 기이한 말이겠는가! 커다란 사물은 반드시 커다란 곳에서 살아가며, 커다란 곳은 이런 커다란 사물을 낳을 뿐이다. 이치가 그렇다. 날개가 크면 날아오르기 힘들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을 타고나서야 구만리를 올라갈 수 있다. 한번 올라가면 반년을 날아 하늘의 못(天池)에 이르러 쉰다.
야마野馬는 공기가 움직이는 것이다. 야마진애野馬塵埃는 모두 붕이 올라타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고 푸르나 하늘의 본디 색깔인지 아니면 하늘이 멀어서 닿을 수 없어 그런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붕이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것이나 사람이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나 같아지면, 붕은 올라가기를 멈추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붕이 도리의 멀고 가까움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뽐내는 것을 만족하며 떠난다는 뜻이다.
鯤鵬之實。吾所未詳也。夫莊子之大意。在乎逍遥遊放。無為而自得。故極小大之致。以明性分之適。達觀之士。宜要其會歸。而遺其所寄也。鯤之化鵬。非冥海不足以運其身。非九萬里不足以負其翼。此豈好竒哉。直以大物必生於大處。大處必生此大物。理固然者。翼大則難舉。故搏扶揺而後能上九萬里。一去半歲。至天池而息也。野馬者遊氣也。野馬塵埃。皆鵬之所慿以飛者。夫天之蒼蒼。竟未知便是天之正色邪。天之為逺而無極邪。鵬之自上以視地。亦猶人之自地觀天。則止而圖南矣。言鵬不知道里之遠近。趣足以自勝而逝也。 ----------
물이 충분히 많지 않으면 커다란 배를 띄울 수 없어. 바닥에 움푹 파인 곳에 잔을 엎지른다고 해. 그럼 거기에 티끌을 배로 삼아 띄울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잔을 띄워보겠다고 하면 바로 바닥에 닿을 거야. 얕은 물에 큰 것을 띄우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바람이 충분하지 않으면 커다란 날개를 띄울 수 없어. 붕새가 구만리를 올라간다는 것은 바람이 그만큼 아래에 있다는 거야. 그래야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어.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면 거칠 것이 없지. 그렇게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가.
그런데 매미와 메추리는 붕을 보고 비웃는단다. "우리는 바짝 힘을 내어 날아가면 나무에 부딪히는 게 고작이야. 그러다 나무에 닿지 못하고 땅에 처박히는 일도 있어. 그런데 뭣하러 구만리를 올라가 남쪽으로 날아가고 그런담."
들로 소풍을 떠나는 사람은 세 끼를 먹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부르지. 백 리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밤새워 곡식을 찧어야 해.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어떨까. 석 달간 양식을 모아야 하지. 저 매미나 메추리가 무엇을 알까. 작은 앎은 커다란 앎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삶은 커다란 삶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야.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아침에 피는 버섯은 그믐달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 수 없어. 작은 삶이란 이런 거야. 초나라 남쪽에 명령㝠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다시 오백 년을 가을로 산다고 해. 저 먼 옛날에는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데. 팔천 년을 봄으로 팔천 년을 가을로 살았다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팽조가 오래 살았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만큼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니 애닯지 않겠냐고. 且夫水之積也不厚。則負大舟也無力。覆杯水於坳堂之上。則芥為之舟。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風之積也不厚。則其負大翼也無力。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而後乃今培風。背負青天。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蜩與鷽鳩笑之曰。我決起而飛搶榆枋。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矣。奚以之九萬里而南為。適莽蒼者。三飡而反。腹猶果然。適百里者。宿舂糧。適千里者。三月聚糧。之二蟲又何知。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㝠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衆人匹之不亦悲乎。
【郭注】
붕이 높이 나는 것은 날개가 크기 때문일 뿐이다. 자질이 작은 자는 큰 것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자질이 큰 자는 쓰는 것이 작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치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고, 사물에는 정해진 한계가 있다. 각기 어울리는 일에 만족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다. 생명의 근본을 잃고, 지극히 당연함과 동떨어져 살아가며 제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고, 제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하면 하늘에 하늘에 날개를 드리울 정도로 커다란 존재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애써 힘을 내어 날아가도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높은 곳을 좋아하여 멀리 날아가고자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람이 충분하지 않으면 얽매이는 것이 있어 오가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세 끼를 이야기한 세 구절은 가야 할 곳이 멀수록 모아야 하는 양식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날개가 클수록 더 많은 바람이 필요하다.
이충二蟲: 붕과 매미를 말한다. 큰 것을 작은 것을 견주었는데 큰 것과 작은 것 모두 다른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같다. 생각이 다른 것이 어찌 앎이 달라 다른 것이겠는가! 모두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자연스레 그럴 뿐이다. 이것이 자유롭게 노님의 핵심이다.
수명과 지식이 이처럼 크게 다르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역시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본성상 한계가 있음을 알면 이 차이를 슬퍼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알고 조금도 서로 애쓰지 않으니 어찌 천하에 어찌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 커다란 것은 작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꼭 작은 것이 커다란 것을 선망한다. 그러므로 작은 것과 커다란 것의 차이를 예로 들었다. 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선망하여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알면 선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슬픔이란 이 사슬에서 생겨난다. 이 사슬을 끊으면 슬픔이 사라진다. 슬픔이 사라지면 모두가 삶이 편안하다. 여기에서 열자를 말한데 이르기까지 수명과 지식의 크고 작음을 나열하여 예로 들었다. 저마다 자기 입장을 지키면 서로 경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후에야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상대를 내버려 두고 나를 잊으면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입장은 다르나 깨닫는 것은 같으니 나에게 공적이나 명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작고 큰 큰 것을 아우르면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을 사라진다. 작고 큰 구분이 있다면 비록 커다란 붕과 메추리, 관직 생활과 바람을 타고 날으는 것 모두가 사슬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삶과 죽음을 같다고 여기면 삶과 죽음의 구분이 사라진다. 삶과 죽음의 구분이 있으면 대춘大椿과 매미, 팽조와 조균朝菌모두 제 수명을 살지 못하고 일찍 죽어버릴 뿐이다. 그러므로 작고 큼의 구분을 없애고 노니는 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잊은 자는 한계가 없이 무궁한 삶을 산다. 만약 자유로이 노닌다 하면서 한쪽에 메여 있는 자는 비록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여도 한계가 있을 것이니 자취 없이 다닐 수 없다.
鵬之所以髙飛者。翼大故耳。夫質小者所資不待大。則質大者所用不得小矣。故理有至分。物有定極。各足稱事。其濟一也。若乃失乎忘生之主。而營生於至當之外。事不任力。動不稱情。則雖垂天之翼。不能無窮。决起之飛。不能無困矣。夫所以乃今將圖南者。非其好髙而慕逺也。風不積則夭閼不通故耳。三飡三句。所適彌逺。則聚糧彌多。故其翼彌大。則積氣彌厚也。二蟲謂鵬蜩也。對大於小。所以均異趣也。夫趣之所以異。豈知異而異哉。皆不知所以然而自然耳。此逍遥之大意。夫年知不相及。若此之懸也。比之衆人之所悲。亦可悲矣。而衆人未嘗悲此者。以其性各有極也。茍知其極。則毫分不可相跂。天下又何所悲乎哉。夫物未嘗以大欲小。而必以小羡大。故舉小大之殊。各有定分。非羡欲所及。則羡欲之累可以絶矣。夫悲生於累。累絶則悲去。悲去而性命不安者。未之有也。自此已下至於列子。歷舉年知之大小。各信其一方。未有足以相傾者。然後統以無待之人。遺彼忘我。冥此羣異。異方同得。而我無功名。是故統小大者。無小無大者也。茍有乎小大。則雖大鵬之與斥鷃。宰官之與御風。同為累物耳。齊死生者。無死無生者也。茍有乎死生。則雖大椿之與蟪蛄。彭祖之與朝菌。均於短折耳。故遊於無小無大者。無窮者也。冥乎不死不生者。無極者也。若夫逍遥而繫於有方。則雖放之使遊。而有所窮矣。未能無行也。 탕임금이 극에게 물었던 것도 이와 같아.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않는 북쪽 아득하고 컴컴한 바다가 있으니 천지天池, 하늘의 못이라 하지. 거기 물고기 한 마리가 있는데 크기가 몇천 리나 된단다. 그 크기를 아는 사람이 없어. 다만 이름이 있는데 곤鯤이라 해. 거기에 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은 붕이야. 마치 태산처럼 커서 날개를 펼치면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지. 회오리바람을 타고 빙빙 돌며 구만리를 올라가.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에 이르면 남쪽으로 떠나. 남쪽 아득하고 컴컴한 바다로 가는 거야.
그걸 보고 메추리가 이렇게 비웃는단다. "저놈은 또 어딜 가는 거야? 나는 팔짝 뛰어 날아올라도 고작 몇 미터를 날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데 말야. 숲속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면 되었지 또 어딜 갈 필요가 있겠어?"
이것이 작고 큼의 구분이겠지. 그러므로 지혜가 관직 하나에 어울릴 만한 사람, 품행이 고을 하나를 다스릴 만한 사람, 군주 하나를 섬길 만한 덕을 갖춘 사람,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 따위는 메추라기처럼 자신을 본단다. 송영자는 빙그레 이런 사람들을 비웃지. 세상 사람이 모두 그를 칭송해도 신나지 않고, 세상 사람이 모두 그를 비난해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야. 안과 밖의 구분을 확실히 하고 명예와 치욕의 경계를 분간할 뿐이야.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세상일에 대해 서두르지 않을 뿐이야. 그래도 아직 부족한 구석이 있어.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녔다고 해. 시원하고 좋았겠지. 보름을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어. 그는 복을 바라는 일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어. 두 발로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의지하고 있는 게 있었잖아. 만약 천지의 온전함을 타고, 우주의 기운을 움직이고, 끝없는 세계에 노닌다면 어떨까. 그러면 또 무엇에 의지하겠어.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지. 지극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상관없고, 신묘한 사람에게는 공적이 상관없고, 성인에게는 명성이 상관없다고.
湯之問棘也是已。窮髪之北。有冥海者。天池也。有魚焉。其廣數千里。未有知其脩者。其名為鯤。有鳥焉。其名為鵬。背若太山。翼若垂天之雲。搏扶揺羊角而上者九萬里。絶雲氣。負青天。然後圖南。且適南冥也。斥鴳笑之曰。彼且奚適也。我騰躍而上。不過數仞而下。翺翔蓬蒿之間。此亦飛之至也。而彼且奚適也。此小大之辨也。故夫知效一官。行比一鄉。德合一君。而徵一國者。其自視也。亦若此矣。而宋榮子猶然笑之。且舉世而譽之。而不加勸。舉世而非之。而不加沮。定乎内外之分。辨乎榮辱之境。斯已矣。彼其於世。未數數然也。雖然猶有未樹也。夫列子御風而行。泠然善也。旬有五日而後反。彼於致福者未數數然也。此雖免乎行。猶有所待者也。若夫乗天地之正。而御六氣之辨。以游無窮者。彼且惡乎待哉。故曰。至人無已。神人無功。聖人名。 【郭注】
탕이 극에게 물었다는 것 역시 사물이 각기 한계, 각자의 분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분수를 따르면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장자는 탕임금이 물었던 것도 이와 같다고 말하였다.
앞에서 둘의 날개가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르는 곳도 다르다. 천지天池 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겨우 나무를 옮겨 다니는데 그치기도 한다. 다만 각자 타고난 신체를 따라 만족하며 그렇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한다. 여기서 작고 큼의 구분을 말하는 것은 각기 자연스러운 소박함을 가지고 있고 억지로 바라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기 주어진 본성에 안주하면 그 차이를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언급하였다.
자신을 보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은 새가 자기 입장에서 만족했다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송영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똑같을 수 없으므로 웃었다. 온 세상 사람이 칭송하고 욕하더라도 신나게 하거나 물러서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한 부분을 살폈다는 뜻이다. 안과 밖의 구분을 확실히 했다는 것은 자신을 중시하고 다른 사물을 도외시했다는 뜻이다. 영예와 치욕의 경계를 분간했다는 것은 자신을 영예롭게 여기고 남을 치욕스럽게 여겼다는 뜻이다. 거기에 그쳤다는 것은 더 나아갈 수 없었다는 뜻이다. 세상일에 대해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하여 세상일에 느긋할 수 있었다. 아직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가 옳았다고 생각했을 뿐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無所不可)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연泠然은 가벼운 모양이다. 보름이 지나 돌아온다는 것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비록 바람을 타고 다니더라도 일시에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다니는 것 역시 자연스러울 뿐이며, 억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야 다닐 수 있다면 의지하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조건에서든 다닐 수 있어야만 의지하는 것이 없게 된다.
천지는 만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천지는 만물을 몸으로 삼고, 만물은 반드시 자연스러움을 온전함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대붕이 높이 날고, 메추리가 낮게 날며, 대춘이 장수하고, 조균이 단명하는 것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지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저절로 가능해야 온전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지의 온전함을 탄다는 것은 곧 만물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우주의 기운을 부린다는 것은 변화의 흐름을 따라 노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디를 가더라도 그침이 있겠는가. 이렇게 다닌다면 또 어디에 의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처럼 덕이 지극한 사람은 나와 너의 차이를 아득히 지워버리며(玄同) 자유로이 노닌다.
만약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열자 처럼 가볍고 신묘하더라도 바람이 없이는 다니지 못할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있어야만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하물며 대붕은 어떻겠는가. 오직 사물과 구분을 없애고 커다란 변화에 순응하는 자만이 의지하는 것 없이 늘 통달할 수 있다. 어찌 스스로 통달할 뿐이겠는가. 또한 의지하는 것이 있는 자를 따라, 그 의지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끔 한다. 의지하는 것을 잃지 않게 하여 함께 크게 통달(大通)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것이 있거나 의지하는 것이 없거나 내가 똑같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기 그 본성에 안주하면 하늘의 법칙이 저절로 실행되어 알지 못하고 이를 따른다. 그러니 내가 다르다고 할 것이 아니다. 의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다르다고 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하물며 의지하는 것이 있는 자들의 크고 작은 차이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없으니 사물을 따른다. 사물을 따르면 지극하게 된다. 이치가 지극하면 자취가 남지 않는다. 따르고 조장하지 않으면 지극한 이치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공적이 없다. 성인이란 본성에 안주한 자를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그 안주한 것 자체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湯之問棘。亦云物各有極。任之則條暢。故莊子以所問為是也。向言二蟲殊翼。故所至不同。或翺翔天池。或畢志榆枋。直各稱體而足。不知所以然也。今言小大之辨。各有自然之素。既非跂慕之所及。亦各安其天性。不悲所以異。故再出之。其自視亦若此者。亦猶鳥之自得於一方也。宋榮子猶然笑之者。未能齊。故有笑也。舉世毁譽之。而不加勸沮者。審自得也。定乎内外之分者。内我而外物。辨乎榮辱之境者。榮己而辱人。斯已矣者。亦不能復過此也。於世未數數者。足於身。故間於世也。猶未?者。言唯能自是耳。未能無所不可也。泠然輕妙之貌。旬有五日而反。言有待者雖御風而行。不能以一時而周也。然其行亦自然耳。非數數然求之也。非風則不得行。斯必有待也。唯無所不乗者無待耳。天地者。萬物之總名也。天地以萬物為體。而萬物必以自然為正。故大鵬之能髙。斥鴳之能下。大椿之能長。朝菌之能短。凡此皆自然之所能。非為之所能也。不為而自能。所以為正也。故乘天地之正者。即是順萬物之性也。御六氣之辨者。即是遊變化之塗也。如斯以往。則何往而有窮哉。所遇斯乗。又將惡乎待哉。此乃至德之人。玄同彼我者之逍遥也。茍有待焉。則雖列子之輕妙。猶不能以無風而行。故必得其所待。然後逍遥耳。況大鵬乎。夫唯與物冥而循大變者。為能無待而常通。豈自通而已哉。又順有待者。使不失其所待。所待不失。則同於大通矣。故有待無待。吾所不能齊也。至於各安其性。天機自張。受而不知。則吾所不能殊也。夫無待。猶不足以殊有待。況有待者之巨細乎。無己。故順物。順物而至矣。理至則迹滅矣。今順而不助。與至理為一。故無功。聖人者物得性之名耳。未足以名其所以得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