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학》 7장 폐허를 딛고 새로운 주체를 발명하기: 좀비시위와 포스트좀비의 정치학 현실에서 ‘좀비’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롱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부르는 ‘촛불좀비’나 ‘좌좀’, 활기와 의지를 보이지 않는 청년들을 부르는 단어인 ‘청년좀비’. 이런 단어들은 대상을 부두교의 노예좀비처럼 의식 없는 존재로 비하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의식 없는 존재들이 가진 파괴력에 대한 두려움 역시 드러낸다. 어떤 면에서 누군가를 좀비라 부르는 일은 그들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파국으로 치닫는 좀비 장르를 누가 선호하는지도 흥미롭다. 세계의 파멸, 이웃과의 단절, 나의 죽음을 기꺼이 감당할 자만이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오락거리로 소비할 수 있다. 세계가 파멸되고 내가 죽더라도 두렵지 않은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버려진 자들이 아닐까? 자기 몫을 박탈당하고 인간 안에서 배제당하며, 벽 바깥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아닐까? 좀비는 피로하고 더럽고 망가진 신체로 인간의 세계에 침입하여 일상을 파괴하고 목숨을 빼앗는다. 목숨을 빼앗는 일보다 더한 충격은 좀비가 인간을 그들의 동료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로 부르며, 타자들이 자신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란다. 더럽고 추한 몰골, 비굴하면서도 원망에 가득 찬 눈빛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안락한 일상은 이 세계에 폭력과 착취와 질병과 오염이 없다는 환상 속에서만 유지된다. 좀비는 그런 환상을 파괴하러 온 존재이다. 세계가 온통 질병과 분노로 술렁거리고, 우리가 서로를 폭력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비가 일깨워준다. 인간이 인간을 타자화한다면, 좀비는 자신들과 인간이 같은 존재임을 주장한다. 좀비에게 물린 인간이 예외 없이 아주 쉽게 좀비가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 주장은 증명된다. 좀비는 의식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으로 들끓는 존재이다. 좀비의 무차별한 식욕은 절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자신이 먹으려던 인간이 곧 자신의 동료인 좀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좀비는 인간과 달리 동료를 먹거나, 해치지 않는다. 결코 해소되지 않고 끊임없이 샘솟는 좀비의 욕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게 될까? 인류를 절멸하고 문명을 멈춰버린 후 좀비들은 무엇을 할까? 철학자 들뢰즈는 욕망을 음습한 충동이나 무의식보다 생성 혹은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세계를 파괴하고 끊임없이 인간을 먹으려하는 좀비의 욕망도 생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을 먹으려는 좀비의 식욕은 인간을 감염시켜 자신의 동료로 만들어버린다. 파국의 세계에는 좀비들만이 우글거리고, 이제 세계는 온전히 좀비들의 몫이 된다. 인간이 좀비가 되었다면, 좀비는 다시 무엇이 될까? 좀비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존재이다. 우리는 좀비라는 대리자를 통해 세계의 파국을 상상하고, 그 파국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한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소통하는 존재인 포스트좀비는 그렇게 태어났다. 포스트좀비와 인간의 욕망은 다르지 않다.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 삶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욕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