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 <하버드 중국사 청> 탱자로 변하지 않은 귤2020-07-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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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하버드 중국사 청_서문, 1장, 2장_20200729.pdf (299.5KB)

탱자로 변하지 않은 귤

에레혼

차이나 리터러시 세미나를 시작한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많은 발제문이 쌓였고, 초반에 읽었던 책을 가지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번에 <하버드 중국사 청>을 읽으면서 불현듯 올해 초에 내가 발제문에서 언급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귤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橘化爲枳)’는 고사성어가 있다. 남방에서는 귤이었던 것이 회수(혹은 회하淮河)를 건너 올라가면 탱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은 환경에 따라 동일한 것도 전혀 다른 성질이 될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설명하고 있지만 회수를 기준으로 한 중국 남방과 북방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관습적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핵심은 강 하나 차이로 귤 종자에서 다른 과일이 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등장하는 오랜 우화가 떠오른 까닭은중국의 밖에서 안으로 넘나들었던 이민족들의 모습이 마치 귤이 탱자로 변하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제로 적용해서 성어를 만들면이화위한夷化爲漢(이민족이 한족이 되다)’ 정도 되는 아무 말(?)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중국으로 들어오며 한족이 되고자 했던 이들은 있으나 다시 이민족의 문화를 찾고자 한 이들은 드물었다는 것이다. (“늘어나고 섞이고 드나들고”, 2020.01.08.)

이 발제문은 거자오광의 <전통시기 중국의 안과 밖>을 읽고 쓴 것이다. 사실 <하버드 중국사 청>를 읽기 이전부터 위 인용구를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애초에 거자오광의 책에서도 이민족의 한화를 ‘이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라고 단정짓지 않았다. 이민족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중국 민족주의 사관을 답습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민족의 중국 통치를 가르칠 때 한화漢化는 종종 소환되는 개념이다. 원나라는 몽고사인가, 중국사인가? 하는 질문부터 윌리엄 T. 로 같은 신청사 학자들이 지적하는 만주족에 대한 정의 문제까지─이민족과 한족 융화된 왕조를 언급할 때 ‘교과서적 시각’이 주로 동원된다.

우리나라 학술계가 중국과 심정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신청사와 같은 수정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하버드 중국사 청>을 읽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저자는 중국의 근대사 연구를 주도했던 페어뱅크의 관점이 서서 학술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중국 연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13~15) 신청사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2020년에도 페어뱅크의 영향력은 여전히 아시아에 남아있다. 예컨대 청나라 말기 문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자는 중국에서 ‘명ㆍ청대 문학 전공’을 선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 학계에서 말하는 명ㆍ청대 문학이란 명대 초기부터 청대 중반까지를 지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 1800년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청나라 문학을 전공하는 고전문학 연구자가 아닌 근대문학 연구자로 분류된다. 이런 분류 역시 1842년을 기점으로 중국사를 나누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소개된 신청사는 청나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여러 가지 핵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민족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신청사 연구자들은 “만주족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은 만주족과 같은 종족은 생물학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한번 결정되면 끝까지 지속된다는32, 종래의 청사 연구가 고집해온 허상을 꼬집는다. 아이신 기오로 씨족은 필요성에 의해서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규정했다. 스스로를 금나라의 후손이라 칭한 일이나 오행설에 근거하여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사건 등이 ‘필요에 따른 민족 서사 부여’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다. 청나라는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 나서 명나라의 제도들을 모방한 ‘전력’이 남아있다. 이러한 전력으로 인해 청나라의 통치자는 한족 문화를 동경한 오랑캐로 규정되어 버린다. 그러나 모방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하버드 중국사 청>에서는 이전 조대의 역사를 편찬하는 작업을 “이전 왕조에 대해 특별한 지식과 향수를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들의 열정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58” 것이라 해석한다. 역사 정리 작업을 유가 통치 모델을 따르는 국가의 의례로 규정하는 시각과 윌리엄 T. 로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명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ㆍ발전시킨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변방의 이민족이었던 청은 중원 국가의 정치 체제나 민족의식을 염두에 둔 채로 자신들의 국가를 그려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모든 요소를 중국에 적용시키고자 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버드 중국사 청>에서는 ‘중화제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중화제국은 ‘이른 성립, 오랜 지속’이라는 국가적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기원전 3세기에 도입된 제국의 통치 방식은 1900년대가 다가올 때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려니 다시금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오래 지속된 체제 속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새로운 역사 해석은 청나라만을 두고 이뤄질 것이 아니라 중국 역사 전반을 두고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리장성 밖의 야만적이고, 날쌔고, 용감한 기상이 담긴 피를 취하여 중원 문화의 퇴폐적인 몸에 주입하니 오래된 더러움이 제거되었다. 새로운 기회가 다시 열려 확장하게 되니 마침내 예기치 못한 세상의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금명관총고金明館叢稿>)

중국의 20세기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은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세력이 무천진武川鎭이라는 지역에서 발흥하였다는 연구를 발표해 학계에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호한胡漢체제─이민족과 한족의 연합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남북조시대 문벌 세력이 선비족과 힘을 합친 세력1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가 수ㆍ당을 세웠다는 주장이며, 줄곧 ‘근본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온 수ㆍ당의 정체성에 쐐기를 박는 이야기이다. 진인각도 민족 개념보다는 특정 지역에서 모였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관롱집단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사를 다시 써야 한다면 무엇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지도 다시금 고민해보아야 한다. 우선은 공부하지 않아 생기는 무지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겠다. 신청사를 두고 중국의 동북공정 야욕이 담긴 사관이라고 비판하는 글들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신청사의 만주족에 대한 주목이 만주 지역을 중국 고유 영토로 분류하려는 시도로 이해한 듯하다. 청나라에 대한 최신 연구는 중국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을 넓혀줄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연구는 왜 서구에서 아시아로 전래되어 들어오는지─<하버드 중국사 청> 전반부를 보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1 흔히 관롱집단關集團이라고 부른다. 이 집단의 문벌 세력이 관중(關中, 현재의 산시성)과 농서(西, 현재의 간쑤성 동남 지방)에 본적을 두고 있어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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