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히지 않는 양자 세계
- 유령장 1926년 8월, 옥스퍼드 / 막스 보른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함수가 물질세계의 실체를 서술한다고 생각했으며, 전자가 입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수많은 ‘물질파'들이 겹치고 증폭되면서 나타난 착시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는 머릿속에 ‘파동묶음(wave packet)’을 떠올렸는데 진폭이 큰 파동들이 시공간의 특정 지점에 모여 더해지면 중심에서 진폭이 아주 크고 그 밖의 지점에서 진폭이 아주 작은 하나의 파동이 형성된다. 이 파동묶음은 현실 세계에서 질량이 한곳에 모여 있는 입자처럼 보인다. 파동묶음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파동의 전체적인 크기가 파장보다 훨씬 커야 한다. 그러나 원자와 같은 미시적 규모에서는 이 조건이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이 해석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슈뢰딩거는 광전효과를 안정된 파동 상태의 매끄럽고 연속적인 전환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막스 보른은 전자와 원자의 충돌을 양자역학으로 체계화하여 복사(광양자)와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했다. 양자도약을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1926년 6월 <물리학시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을 완성하여 제출했다. “원자와 전자의 충돌을 ‘특정 진동수로 진동하는 원자와 평면전자파동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해석해보니 전자파동의 중첩으로 생성된 복잡한 파동이 얻어졌고, 이 파동은 다시 분리되어 상호작용의 결과로 전자파동이 산란된다.” 전자와 원자의 충돌 전의 상태와 충돌 후 상태 사이의 인과적 연결 고리가 상실된 것이다. 보른은 아인슈타인의 평가에 영향을 받았는데 광양자의 특성을 드 브로이의 파동-입자 이중설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인슈타인은 파동을 광양자가 특정 경로를 따라갈 확률을 결정하는 일종의 ‘유령장(Gespenterfeld, ghost field)으로 표현할 것을 제안했다. 보른은 그 이후, 전자의 파동을 물리적 실체로 간주했던 슈뢰딩거의 해석을 폐기하고, 아인슈타인의 논리를 따라 ‘충돌과 같은 양자적 전이 과정에서 특정 결과가 나타날 확률'로 해석했다. 양자역학에 확률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물리학 이론에서 기본적 요소가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양자역학은 전이의 원인을 명확히 서술하여 전이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각 상태의 종류와 이들의 확률을 결정한다. 다양한 결과들 중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원인을 규명하고 가능한 결과를 나열할 수는 있지만, 이들 중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순전히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물리학계는 양자 수준에서 ‘실체란 무엇인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 빌어먹을 양자도약! 1926년 10월 코펜하겐/슈뢰딩거, 보어, 하이젠베르크
이 무렵 양자역학은 파동함수의 해석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양자도약을 제거하고 고전적인 시-공간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슈뢰딩거의 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공전하면서 어떻게 궤도를 유지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지 파동역학이나 행렬역학 둘 다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에 집착한 이유는 파동 자체가 연속적 객체이고 시각화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근본적으로 시각화할 수 없는 물리학을 서술하려면 고전물리학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동과 입자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원자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이론이 반드시 필요했다.
- 불확정성 원리 1927년 2월 코펜하겐 / 하이젠베르크
당시 물리학계는 행렬역학을 통해 이미 얻어진 결과들을 파동역학으로 재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또한 그들은 행렬역학으로 해결할 수 없거나 너무 복잡했던 문제들도 파동역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꾸만 위상이 사그라드는 행렬역학을 안타까워한 하이젠베르크는 관측된 양자의 의미와 중요성을 줄곧 생각해오다가 행렬역학에 ‘시각화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울리의 편지와 아인슈타인의 조언을 곱씹으며 하이젠베르크는 드디어 올바른 질문을 찾아냈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주어진 장소에서 근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주어진 속도에서 근사적으로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서술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근사적인 값'의 오차를 무한정 작게 만들 수 있는가?” 그는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을 곱한 값은 플랑크 상수 h보다 작을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를 유도해냈다. 관측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확도에는 한계가 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h를 0으로 가정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불확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의 위치가 정확히 관측될수록 전자의 운동량은 불확실해지고, 이와 반대로 전자의 운동량이 정확히 관측될수록 위치가 불확실해진다. 이 모든 내용은 방정식 pq-qp=ih (p:운동량, q:위치) 속에 함축되어 있다. 에너지와 시간에도 이와 비슷한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 역시 알아냈다. 에너지와 시간 사이에도 극복할 수 없는 불확정성이 존재하여 둘 다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적 상호작용이 근본적인 단계에서 불연속적이라는 것은 상호 작용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물리학의 본분은 ‘관측된 결과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은 우리에게 관측된 모든 것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가 ‘우연히' 선택된 것이다. 양자역학은 ‘나올 수 있는 가능한 결과들과 각 결과들이 나올 확률'만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 코펜하겐 정신 1927년 6월, 코펜하겐 /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이 해의 봄을 치열한 논쟁으로 다 보내버렸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굳이 고전적 논리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보어는 파동과 입자의 상보적 관계를 불확정성원리의 핵심에 놓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 이론의 범주를 넘어선 곳에서 기존의 언어는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새로운 수학 체계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든 수학 법칙을 따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보어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수학이 아닌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언어야말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렬한 토론(?) 이후, 이들은 불편한 동맹 관계를 갖게 되었지만 파동-입자의 상보성, 불확정성 원리, 파동함수의 확률적 해석, 파동이론의 고윳값과 관측 가능한 물리량(운동량, 에너지 등) 사이의 대응 관계 그리고 대응 원리 등은 이 해에 토론에서 얻어진 값진 결과였다. 새로 탄생한 양자역학의 개념들이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발 없이 빠르게 수용되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 추세를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정신(Kopenhagener Geist der Quantentheorie)’'이라 불렀으며 훗날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으로 불리게 된다.
- 존재하지 않는 양자 세계 1927년 9월, 코모 호 / 보어와 코펜하겐 해석
보어는 코모 호 학회에서 인과율과 시공간의 상보성에 중점을 두고 강연을 진행했다. 보어의 주장에 따르면 양자역학의 가정에 따르면 계를 교란시키지 않고는 어떤 관측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시간과 공간도 연속체로 간주할 수 없다. 관측 과정에서 계에 속하지 않는(계와 무관한) 상호작용을 허용한다면 계의 상태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상적 의미의 인과율도 낄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 인과율은 관측 결과와 정의를 기호로 이상화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고유의 특성일 뿐이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종의 이론이며, 이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한계 너머에 숨어 있는 실체를 서술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면 거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적 개념이 포함될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양자적 실체는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며, 우리의 경험을 넘어선 영역에 존재한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추상적인 양자물리학적 서술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리학의 본분은 자연의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고전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실험도 고전적인 수준에서 실행할 수 밖에 없다. 이 개념을 뛰어 넘으려면 ‘알 수 있는 세계'의 경계를 넘어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완전한 헛수고'라는 뜻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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