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마오] 혁명에 이르는 길은 직선이 아니다 (0424 발제)2019-04-24 09:16
작성자
첨부파일마오쩌둥 1권 9~10장 발제.hwp (33.5KB)

《마오쩌둥》 9장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주석 (1931년 가을 ~ 1934년 가을)

 

국민당의 토벌작전 이상으로 마오를 괴롭혔던 건 중국공산당 내부의 알력이었다. 상하이에 있던 당 중앙은 계속해서 마오를 견제하고 통제하려 했다. 장시소비에트에 대한 영향력 강화는, 상하이 활동이 어려워진 당 지도부의 자구책이었다. 소련 유학파 출신 당 중앙 지도부는 스탈린이 마오를 옹호하고 있음에도, 마오에 대한 비난과 견제를 계속했다. 상하이에 남은 유학파들의 활동은 갈수록 불리해졌고, 마오와 홍군의 활약은 중국공산당의 방향을 바꿔놓고 있었다. 1931년 10월 보구는 어쩔 수 없이 마오에게 새로 구성되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반이 되어달라고 청했다. 실제로 마오에게는 명예만 있는 자리로 쫓겨나는 셈이었다.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표회의’는 새로운 ‘국가’를 선포했다. 루이진을 수도로 정하고 마오쩌둥을 국가주석 및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다. 마오가 이전에 맡았던 어떤 직책보다 높은 지위였으나, 단 몇 사람의 의견만으로도 쫓겨날 수 있는 처지였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소련 유학파들은 소련에 대한 위협을 먼저 걱정했다. 마오는 소련에 대한 위협을 걱정하기보다 반일감정을 활용하여 항일통일전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 한동안 정치적 곤경과 우울을 겪었다. 마오가 쉬는 동안 보구의 의견에 따라 대도시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었고,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다시 소환된 마오는 장저우를 점령하면서, 전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저우언라이와의 공조도 이때 시작되었다.

 

저우언라이의 거듭된 중재에도 불구하고 마오와 당 중앙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마오는 1931년 10월부터 2년 간 주요 군사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다. 공산당원이 된 12년 간 여섯 번째로 밀려난 참이었다. 군사 결정 과정에서는 밀려났지만, 여전히 국가 주석의 자리에 있던 마오는 국가의 행정 체계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경제정책에 관심을 가졌다. 상거래를 관리하고,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도 발행했다. 토지 개혁도 중요한 문제였다. 마오는 농촌 현실을 잘 아는데다 세심하게 조사를 시행하는 능력도 갖추었다. 국민당과의 긴 내전 때문에 마오가 시행한 토지조사운동이 중단된 후에도, 이 문제는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 토지 문제로 인한 갈등이, 계급을 넘어 고발과 피해망상을 동반한 증오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선거법도 제정되었는데, 마오는 1/4 여성할당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결혼제도 개혁과 성 해방 역시 마오가 중요하게 여긴 사업이었다.

 

마오가 군사결정에서 밀려난 동안 홍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국민당 19로군과의 교섭작전도 실패했다. 1934년 초 보구와 저우언라이는 소비에트 근거지 포기를 예감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이전에 마오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권한이 축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독일인 오토 브라운의 군사작전은 실패했고, 보구는 교조주의라고 비판받았다. 모든 지휘자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은 마오뿐이었다. 1934년 10월 보구가 ‘전략적 이동’를 지시하자, 마오는 장시성 소비에트 근거지를 철수하는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7년간의 전쟁 끝에 담요와 외투, 책 한 꾸러미만 들고 강을 건너는 마오의 직책은 아직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국가 주석이었다.

 

10장 대장정 (1934년 가을 ~ 1937년 여름)

 

유럽에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소련에서도 대숙청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계는 점자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고, 일본과 소련의 군사대립도 점점 가시화되었다.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공산당 타도 이후로 미루고 있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1932년 4월에 발 빠르게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공산당이 홍군을 ‘항일선봉부대’라 칭했을 때 선전의 효과도 상당했다. 이전에 마오가 주장한 전략이 중국공산당에게 유리한 기회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오도 이를 잘 활용하여 1935년 1월 쭌이 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당 지도부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마오의 현란한 지휘 속에 홍군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행군을 계속했고, 마침내 양쯔강을 건넜다. 아무도 마오의 지도력에 도전할 수 없었기에 이때부터 마오도 조금씩 관대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쪽을 향한 행군’이 ‘장정’으로 변해가면서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졌다. 서사시의 절정은 다두하의 루딩 다리에서 쓰였다. 루딩 다리를 건너면서 중국본토를 벗어난 홍군은 아시아의 극한지역들을 행군했다. 여름옷을 입고 대설산을 넘고, 식량도 없이 늪지대로 이루어진 대초원을 횡단했다. 중간에 장궈타오 군대와 합류했으나, 마오와 장궈타오의 알력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무선 송신기가 없어 모스크바와의 교신도 중단된 상태였다. 극한의 상황에서 마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련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다. 발언 얼마 후 홍군은 산시성에 공산당 근거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바오안 근처 삭막한 황야지대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홍군은 5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마오는 이후 여기서 12년을 보내게 된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 전략이 공개되었다.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파시스트에 대항하기 위해 단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홍군 역시 행군 중에 ‘항일통일전선’ 을 호소하는 선전을 계속했다. 중국에는 국민당 이외에 공산당이 연합할 만한 다른 세력이 없었으므로 국민당과 연합해야 했으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갈등하던 지도부는 실리를 챙기고 현실을 반영한 유연한 정책을 쓰기로 했다. 1935년 와야오부 회의에서 소련 중심의 교조주의가 폐기되었다. 와야오부 결의문은 일본과 장제스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부농과 민족자산계급의 역할을 인정하기로 했다. 공산당은 부농의 토지를 더 이상 몰수하지 않기로 했고, 소자산가와 지식인에게 노동자, 농민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기로 했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과거의 지도부가 자신들의 결정을 번복하는 결의문을 스스로 채택하도록 종용하면서, 당 내 자신의 이념적 영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마오는 승리를 자축하며 주장했다. ‘통일전선이 옳습니다. 관문주의는 옳지 않습니다. … 세상의 모든 활동이 그렇듯이 혁명 역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갑니다.’ 마오는 어느새 자신의 적대세력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신 편으로 끌어들이는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용력은 국민당을 향해서도 발휘되었다. 마오는 인근 동북군을 지휘하는 장쉐량과 교섭했다. 일본에 원한이 많은 장쉐량은 장제스의 대일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공산당과 장제스의 교섭은 계속해서 결렬되었고, 1936년 12월 장쉐량은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해 구금했다. 마오의 바람과 달리 장쉐량은 장제스를 제거할 마음은 없었다. 이 무렵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장제스를 잠재적 동맹자로 삼으려던 스탈린은 장쉐량과 중국공산당을 강하게 비난했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 처음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마오는 짜증과 함께 ‘국제주의’가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장쉐량의 기행에 가까운 행동 탓에 시안사건은 제법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장제스는 어디에도 서명하지 않았으나, 장쉐량과 공산당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침략공격이 베이징과 상하이 등 대도시까지 덮쳐온 까닭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장제스는 공산당의 요구대로 공산당 군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곧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37년 9월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통일전선이 부활했음을 선언했다. 10년간 장제스가 그렇게 괴멸시키려 노력했던 공산당과의 연대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10년 전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국민당에서 축출될 때, 마오가 뼈아프게 새겼던 것은 공산당 군대의 필요성이었다. 마오의 예견대로 군대의 힘 덕에 공산당은 다시 중국 정치무대에 합법적 정당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마오에게도 새로운 권력의 길이 열렸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