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5징에서 6장 2019. 4. 10 손미경 5장 중국 공산당 창당과 국공 합작 (1921년 여름~1927년 봄) “중국의 해방은 오직 대중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1921년 여름 당시 당원수 490명. 마오를 포함한 중국공산당 대표 11인과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2명. 1921년 여름, 중국이름 마린(馬林)으로 불린 스니블리트는 레닌의 결정에 따라 코민테른에서 중국인 동지들을 돕기 위해 처음으로 파견 되었다. 물론 그가 도착하기 이전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 천두슈 그룹이 중국에서 정통성 있는 유일한 공산주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결정은 1921년 6월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 채택되었고 다음에 파견된 보이틴스키는 9개월 동안 천두슈가 상하이에 ‘공산당 소조’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으며 ‘사회주의 청년당’을 만들고 잡지 < 공산당 >을 발간하는 것, 당의 선언문을 기초하는 것까지 도왔다. 마오는 7월 23일로 예정된 창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허수헝과 함께 1921년 6월 말에 극비리에 창사를 출발하였다. 예정일을 며칠 넘긴 후 천두슈와 리다자오가 참석 못한 가운데 장궈타오의 주재로 대회가 시작되었고 중간에 감시를 피해 눈에 띄는 외국인 2명을 배제하고 선상에서 논쟁거리를 급 마무리 한 채 창당대회를 마쳤다. 창당대회의 논쟁거리는 첫째, 어떤 유형의 당을 건설할 것인가. 둘째, 이 당은 자산 계급의 기관들, 특히 국회와 광저우 정부와 베이징 정부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셋째, 코민테른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스니블리프와 그의 동료 니콜스키는 이 대회 참석자들이 모두 학생, 교사인 점을 지적하며 노동자 계급과 강력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무산계급 독재를 인정하는 볼세비키 방식이 참석자들의 강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통과 되었다. 나머지 두 가지 쟁점은 심각한 의견 불일치 속에 수색 사건이 터져 코민테른의 입장이 배제된 강령 초안이 통과 되었다. 그 결과 레닌의 입장을 견지 할 수 없는 초안이 잡혔고 중국공산당 입장에서는 모스크바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코민테른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동등한 상대로 여긴 내용의 초안이었다. 맹점은 중국 현실에 더 잘 맞는 강령을 채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그 후 40년간 공산주의 ‘메카’와 중국공산당이 엇박자 스탭을 밟게 한다. 이때 마오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향후 2년간 노조 조직가로 활동에 주력했다. 당시 장궈타오는 마오를 후난 사람 특유의 거친 태도를 보였으며 일반적인 교양 지식은 수준이 높았지만 마르크스주위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마오는 1921년 9월, 12월 두 차례 안위안 탄광을 방문하여 노동자 실상에 전문성을 갖게 되었고 쯔슈대학을 세워 학문적 코뮌을 구상하였다. 또 22년 10월 10일 중국공산당 후난성 지부의 서기를 맡아 지부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11월 초 후난성노조연합회가 설립되어 마오가 총서기가 되고 연말 까지 후난성에서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반동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아 다음해 봄 2.7학살과 같은 일련의 탄압으로 노동운동이 퇴조하게 된다. 1923년 봄 마오는 상하이로 온다. 2 국공 합작 국민당에 대한 중국공산당과 모스크바의 같은 듯 다른 두 속내 1922년 당시 쑨원이 이끌고 있던 국민당은 광저우에 기반. 공산당이 보기에는 국민당이 베이징 정부에 비해 덜 반동적이기는 하지만 분명 가부장적이며 전근대적인 정당. 국민당은 비밀결사, 반청반만 투쟁, 교양 있는 엘리트층에 동원된 지식계와 문학계 파벌에 뿌리를 두고 핵심지지 세력은 광둥성과 중국 남부의 몇몇 성으로 한정. 게다가 쑨원은 군벌을 적으로 인식하기보다 미래에 거래 할 수 있는 잠재적 파트너로 생각. 반면 레닌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반드시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천두슈와 마오, 장궈타오, 기타 세 개 성의 공산당 지부 단원들은 어떠한 연합에도 전면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나 소련의 레닌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코민테른, 소련 정부, 국민당 좌파, 공산당 내의 국민당 동조자, 군벌들 간에 벌어지는 온갖 정쟁에서 비롯된 압력을 받았다. 마침내 1922년 7월 중국공산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일시적인 통일전선의 필요를 인정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고 8월에 국민당을 혁명적 정당으로 간주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내합작’이라는 전략을 통과시켰다. 1923년에는 분위기가 급변하여 공산당으로서는 국민당과의 통일 전선에 이의가 없는 상항. 이때의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운동이 완전히 분쇄 되었으며 존립할 법적 근거가 없어져 지하조직화 직전으로 당내 분열이 극에 달하였다.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회의에서 공산당 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방식이 아니라 모든 공산당원은 자동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해야한다는 코민테른의 노선이 가까스로 승인. 즉 국민당이 ‘국민 혁명의 중심세력이며 그 지도 역할을 맡을 것’ 동시에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을 집결하는 ‘특별한 과업’을 맡는 것으로 당 대회가 끝났다. 마오는 당 중앙위원 9명중 1인으로 선출 되었고 신설된 중앙국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인사 책임자가 되었다. 3차 전대를 통해 공산당은 지난 2년 보다 더 강해지고 더 중앙집권적이 되었으며 더 레닌주의적이 되었다. 또한 당내 분열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 공산당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다수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를 통해 볼세비키 정당의 ‘민주집중제’ 원칙을 처음으로 경험 하였다. 마오는 이때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전업 관료가 되었으며 전국차원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자유주이 엘리트들이나 노동계급과 맺었던 유대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지적인 차원에서는 ‘2.7 학살’을 겪으면서 노동계급 단독으로는 권력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처음으로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군사적 경로인데 쑨원에게 ‘중앙집권화된 국민 혁명군’ 창설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 다음 경로는 바로 농민이다. 혁명에 이들을 반드시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당분간 사변으로 남겨 놓은 채 당이 채택한 ‘통일 전선’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당 대회 이후 국민당에 가입하여 이후 1년 반 동안 통일 전선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중국의 해방은 오직 대중 속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공 합작 기간 동안 마오는 자신의 신념과 관련해 위기를 겪게 된다. 당시 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농민은 관심 밖에 있었다. 레닌도 언급했듯이 후진국의 무산 계급 정당이 농민층과 강력한 연대를 맺지 않고 권력을 획득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토피아적 생각이라고 조롱하였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를 구성하는 도시 출신 지식인들은 이 말에 전혀 반응 하지 않았다. 2차 당 대회에서 3억 농민이 ‘혁명원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 하지만 공산당은 농민을 이끌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중국공산당이 농민에 대해 완고한 이유는 당 지도부를 구성했던 지식인 젊은이들이 농민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이었다. 즉 공업은 아무리 원시적인 수준이더라도 개념상 근대를 의미하며 착취당하고 짓밟히고 있어 노동자 계급이야 말로 새로운 혁명의 주체라 여겼다. 반면 농민은 중국의 모든 후진적이고 우매한 것들의 상징으로 혁명이 쓸어버려야 할 유교제국의 어두운 유산 중에서도 핵심. 1925년 초 마오는 농민이라는 뿌리로 되돌아 왔다. 그는 사오산에서 두 개의 농민 단체를 조직하였다. 때마침 1925년 상하이에서 5.30사건이 발생하여 반제국주의 물결이 전국에 번졌다. 마오의 주 활동지인 창사 전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나 마오는 바로 정치 활동을 개시. 6월 중순 사오산에 공산당 지부를 만들어 농민이 주체가 되는 조직 활동을 벌여 20개가 넘는 농민 협회가 만들어 졌다. 이런 경험을 통해 마오는 코민테른이 옳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5.4사건으로 젊은 급진파들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모여들고 국민당내 좌파였던 왕징웨이 지지세력이 확대되었는데 국민당은 1925년 초 쑨원 사망 때와 비교하여 훨씬 더 강력해지고 급격하게 왼쪽으로 이동하였으며 장제스는 광저우 위수 부대의 부대장으로 새로 창설된 ‘국민 혁명군’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오는 이런 국면을 혁명이 오기까지는 혁명을 진전시키는데 국민당이 공산당 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또한 당시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출발당시부터 농민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25년 가을 국민당은 ‘농민부’를 만들었고 농촌지역의 조직가들을 위해 ‘농민운동강습소’를 만들어놓은 상태였으나 공산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오 자신도 국민당의 중집위 후보위원. 공산당 내에서는 공식 직책이 없었다. 이제 혁명 투쟁의 중심은 상하이가 아니라 광저우로 ‘국민정부’ 수반인 왕징웨이가 마오에게 선전부장 대리의 자리를 주었다. 이후 18개월 동안 마오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두 가지 사안- 국민당 좌파를 강화하는 일과 농민을 조직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한편 이시기에는 소련도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다. 24년 초 레닌 사망 이후 등장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권력투쟁 중이었으며 국민당은 25년 봄 쑨원 사후 좌파지도자 왕징웨이가 쑨원의 유언인 통일 전선과 소련의 연합을 지지하기로 한 방침 속에 국민당 내부도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장제스의 부상이다. 국민혁명군 제1사령관으로 그해 가을 일련의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광둥의 국민당 정부를 지역 군벌의 공격으로 보호하여 그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당 대회는 국민당이 급격하게 왼쪽으로 기울었는데 중도파인 장제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당은 태생적으로 여전히 자산계급 정당이며 당의 지지 세력은 직 간접적으로 상당 부분 지주의 가족. 즉 개혁은 지지하지만 기존 농촌 질서를 무력으로 타도하는 것은 결코 지지 할 수 없다는 계급문제를 지녔다. 레닌 사후 집단 체제의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 의견에 동조하여 국공합작에서의 공산당의 목표는 당연 국민당 내부에서부터 국민당을 장악하는 것. 장제스와 소련은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벌 개시 시점을 둘러싸고 지금 북벌을 시작해야한다는 장제스와 연기를 요구하는 소련과 중국 공산당 측과 갈등을 빚어 1월 중순 장제스는 제1군사령관에 물러났다. 하지만 3월 20일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쉽게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국민당에 반드시 필요한 지도자로 입지를 굳히는 상황. 이후 49년간 공식 직함이 있든 없든 국민당 지도자로 역할을 계속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 중앙 공산당의 극심한 내부분열이 중요원인. 이때의 마오는 중앙공산당이 볼 때 다루기 힘든 사람, 정통을 벗어난 견해를 지닌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사실 거의 일 년 동안 당 중앙과 접촉을 끊고 있었다. 이 쿠데타로 장제스에게 크게 유리한 타협안이 나와 5월 국민당 중집위는 국민당 내 공산당원의 권한 및 활동을 대폭 축소하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으며 대신 그는 국민당 우파를 축출하겠다는 약속했다. 우파 축출은 장제스에게도 필요한 일이였다. 1926년 7월 9일 북벌이 시작되었다. 군벌들을 격파하고 국민당의 깃발아래 전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마오가 자신의 자리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북벌에서 농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북벌이 개시된 이후인 1926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농촌 지역은 폭동의 거대한 물결에 휩싸였다. 여름에 40만 명이었던 농민협회의 회원 수는 2백만 명으로 뛰었다. 이런 농민운동의 양상에 대해 국민당 좌파와 심지어 공산당까지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엉망진창’이라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마오는 이에 대해 오히려 농민들의 ‘지나친’ 행동들은 필수이며 더 나아가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지주의 권력과 위세를 분쇄하는 것이 농민 투쟁의 중심 과제. 마오는 후난에서 몇 주간의 경험이 너무 강렬하여 일생동안 이때 얻은 교훈을 잊지 않는다. 혁명은 결코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고 어떤 혁명적 시도라도 항상 지나친 면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은 공개적으로 폭력을 옹호한 점이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 후난성 농민운동시찰 보고서>에 대한 입장 차이로, 보고서를 칭찬한 취추바이와는 정치적으로 단단하게 묶였으며 천두슈와는 더 멀어졌다. 북벌이후 농민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면서 공산당 지도부는 농민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당 중앙국은 마오를 중앙위 농민운동위 서기로 임명했다. 마오가 스스로 결정했던 정치적 망명이 23개월 만에 끝났다. 이 기간 그는 농민 혁명 역량을 확신하고 거대하고 복잡한 당 조직 최고 지도부에서 어떻게 처신 할지 아주 중요한 기술을 습득했으며 이제 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단순히 추상적인 차원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소위 ‘인민’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되었다. 6장 국공 합작의 붕괴 (1927 봄~ 1927년 여름 ) “노동자와 농민이 우선인가 계급연합이 우선인가?” 1927년 봄 만 해도 대세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압도적이었다. 북벌 중에 난창을 근거지로 한 장제스와 우한의 국민당 좌파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에 더 가까이 접근할 기회로 여겼다. 천두슈는 국민당 좌파가 공산당과 우파의 직접 충돌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고 주장. 따라서 공산당원은 코민테른이 주장한 대로 국민 좌파와 연합을 해칠 위험이 있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지 말도록 했다. 이는 연합전선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 였는데 그 배경에는 이년 전에 1천명이 안되던 당원 수가 북벌로 인해 26년 말 3만 명으로 급증. 그러나 이 전략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공산당이 ‘짐꾼 역할’ 즉 우경 투항주의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전략으로 장차 장제스와 국민당 좌파 사이에 당권을 둘러싸고 충돌의 분위기가 점점 뚜렷이 형성되면서 내부분열이 심화 되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국민당 좌파의 부활이 불가능할 것이고, 국민당 우파는 갈수록 더 강력해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공산당 중앙국과 소련 고문들은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서로 협력하여 장제스를 몰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장제스는 3월 26일 자신의 본부를 난창에서 상하이로 옮겼다. 4월 4일 왕징웨이와 천두슈는 상하이에서 공동 성명. 이때의 분위기는 장제스가 혁명을 지지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으로 여겼으며 그의 역할이 끝나면 토사구팽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완벽하게 모두를 속였다. 1927년 4월 12일 수천 명의 ‘노동자 규찰대’ 대원들이 국민당 군을 보조하는 가운데 공산당 근거지를 급습하였다. 4백 명이 넘는 공산당이 죽었으며 훨씬 많은 인원이 다치거나 체포되었다. 다음날 저우언라이는 총파업을 명령하고 1천 명의 노동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군사령부로 행진했으나 군대는 이들을 향해 발포. 이날 이후 누구도 시위를 하지 않았고 장제스와 동맹자들은 상하이를 완전 장악하였다.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장제스의 급습을 예상치 못한 것은 큰 실책이며 현실 정치의 판단력이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탈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전선을 고집했으며 장제스가 장악한 지역 전반에서 좌파를 겨냥한 조직적인 린치가 자행되었다. 또한 국민당 좌파가 장악한 한커우의 경제가 노동자의 투쟁으로 경제가 최악의 상태에 빠진 점이다. 이런 현상은 상하이 자산 계급이 피하고 싶어 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고 싶은 서구열강과 상하이 자본가들은 중국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막을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장제스가 완벽하게 자신의 행동을 위장, 최측근만 빼고는 그의 진의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로 장제스는 국민당에서 공산당을 제거하였고 7월이 되어 공산당 지도부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었다. 국공합작의 붕괴로 당면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농민 봉기 자체가 취소된 상태에서 ‘과연 각 지역의 농민 자위대에 어떤 조치를 내릴 것인가’였다. 마오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산으로 가는 것은 군사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 다음 군대로 편입되는 것. 앞으로 공산당은 병력을 갖추지 않는 다면 무력해질 것이라 보았다. 이러 저러한 논의 중에 실제 상황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무능이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엄청난 결점이 있으며 중국 공산당 조직의 모든 지위에 소련의 조언자들을 배치 할 것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조언자들은 파견되지 않았지만 그는 천두슈와 그 동료들을 무시하는 것이 드러났다. 양측은 중국 혁명 과정 중에 비극적이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모스크바가 내놓는 설명은 소련의 정책은 완전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는 걸로 결론을 내린다. 천두슈는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 7월 중순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 지도부를 비판하는 선언을 채택하고 국민당 좌파는 공산당 역할을 더욱 제한하는 결정을 내린 가운데 허젠 장군의 군대는 대대적인 공산당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마오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모두 은신처로 도피하였다. 그 해 말 국민당 좌파 역시 붕괴하고 왕징웨이는 유럽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말 장제스는 베이징까지 함락하고 드디어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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