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해와 해석 사이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지식을 모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제것도 아닌 지식들을 모아 붙여 놓고는 예뻐졌다고 착각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알록달록한 얼굴들로 표현한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현대인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앎을 창조하고 있지 못하듯이, 그렇다면 과연 나는 니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삶을 제대로 창조할수 있느냐 인데, 사실 나의 삶을 바꾼다 또는 확대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 라고 감히 나는 말하지 못한다. 다른 분들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삶을 보는 관점은 바꿔야 할텐데, 일단 삶을 보는 관점을 바꾸기 이전에 지금 내가 니체의 책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란 책을 읽고 있는 행위속에서 그러한 관점을 실천하고 싶다. 적어도 니체의 책들은 지식을 모으듯이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그냥 단순하게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그러한 책 읽기를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주어와 동사를 찾고 사실적으로 문장을 독해하는 것에 나는 익숙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의 책을 해석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중 가요중에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보다는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이 아니라 독해보다는 먼 해석보다는 가까운 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로 니체 책을 읽어야 할것인가? 쉽지 않은 과제를 스스로에게 던진다. 학자들이 연애를 하는 법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니체는 실랄하게 비판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학자들은 연애를 하지 못한다. 물론 플라톤 같은 철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있지도 않은 본질을 찾으려고 그들의 외부에 진리나 법칙을 맹목적으로 설정해 놓고 진리를 찾아 떠난다. 연애에 실패하는 모든 남성들이 그렇듯이 여성들의 겉옷을 벗김으로써 그 본질을 발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한다.하지만 까도 까도 안나오는 양파처럼, 이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키며 결국 여성을 떠나게 만든다. 진리가 여성이라면 진지함과 집요함으로 진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사랑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여성이 어떤 고유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철학자들이 찾는 진리는 없는 것이다. 니체는 실험실에 있는 과학자, 고문서를 뒤지는 문헌학자,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철학자들의 관음증도 아울러 지적한다. 욕망을 제거하고 가치의 중립을 외쳐대면서 그들은 욕망 없는 관조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무릇 이렇게 해야 한다며 니체는 이야기한다. “태양은 순박하고 창조의 열망에 불타고 있는 것들을 온몸으로 사랑한다. 저기를 봐라. 저리도 서둘러 바다가 태양을 향해 솟구치고 있지 않은가! 너희들은 그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바다가 천개나 되는 젖가슴으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때묻지 않은 깨달음이란 것에 대하여’에서 인용함) 니체는 아웃복서이다.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복서중 한명으로 꼽힌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라는 유명한 신조어를 낳았다. 그만큼 그의 스텝은 날렵했으며 펀치는 가벼웠다. 한방으로 상대를 눕히려는 자의 펀치는 무겁다. 왜냐하면 그의 펀치에는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존재하는 한 그의 펀치에는 원한과 분노와 앙값음의 정서가 스며져 있다. 그의 스텝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의 주먹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자의 주먹이 아니다. 반면 니체는 아웃복서이다. 그의 스텝과 주먹은 가볍다. 왜냐하면 그의 주먹은 창조하는 자의 주먹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창조하려면 망각해야 한다. 니체는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니체는 웃기까지 한다. 니체의 웃음은 긍정의 웃음이다. 그의 웃음은 한방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진리의 수호자의 적의에 찬 분노를 무장 해제시킨다. 니체가 아이의 웃음에서 긍정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한 마리 사자였다. 하지만 그 유명한 용과의 전투에서 니체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용에게 ‘나는 싫다’고 반항했지만,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 니체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는 너자신을 잃고 몰락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너는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늘은 날개, 색, 옷, 그리고 힘이었던 것이 내일은 단지 재가 되어야만 한다. ( 유고, 1882~1883/4 에서 인용)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게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었다. 니체는 고독한 그의 여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이는 숨쉬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인 사람들의 사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니체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