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철학의
출발과 변종,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어쩌면 우리는 철학도 잘 모르고, 근대도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철학과 근대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막상 철학이 무엇이고
근대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곤혹스럽다. 아는 줄 알았는데 설명할 수가 없어 입이
딱 붙어버린다. 몇 권의 철학책을 열심히 읽었는데도 철학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면, 이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도움을 한 번 받아볼 필요가 있다. 철학이
무엇이고 근대가 무엇인지 맥락과 뼈대를 살려 나름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철학책을
거의 읽지 않은 초심자에게도 유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젠가 철학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볼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때 분명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테니.
물론 공부에도 취향이 크게 작용하는지라 이 책의 저자도 모든 철학자들을 같은 강도와 애정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취향이 담뿍 녹아 있는 철학자들의 목록과 철학의 계보 앞에서 연속성을 찾기는
오히려 쉬워진다. 어느새 푸코를 인용하여 데카르트를 설명하고 들뢰즈를 인용하여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저자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그런 태도를 따라 우리는 근대철학의 시작지점에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탈근대의 지점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렇게 책을 읽어가다 보면 철학이라는
다소 딱딱하고 멀어 보이는 학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나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을 데카르트에게서 찾는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데카르트에게 ‘Cogito, ergo sum’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 곧 명제였다. 데카르트가 이 명제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Cogito, ergo sum’은 기독교 초기의 유명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명제를 통해 회의론자들의 의심에 맞서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판단의 근거로 신을 내세운다. 데카르트는 같은 명제에서 인간이 ‘(방법적) 회의’를 통해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에 더 주목한다.
철학을 종교에서 분리하고 진리에서 신을 분리한 이 명제는 판단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다시 신을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의 관심사는 더 이상 신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관념을 타고난다고 주장한다. (‘본유관념’) 그 관념을 누가 주었는지는 데카르트의 관심사가 아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근대의 ‘주체’는 이렇게 태어났다. 주체는 이제 ‘진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근대철학은 주체와 함께 시작되었고, 목표는
진리의 추구였다. 데카르트에게는 ‘어떻게 진리에 이르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후 근대철학에서 신은 진리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존재로만 소환된다. ‘주체’는 명백하게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철학의 분과를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윤리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
즉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정신이 육체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에만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은 인식론이다. 데카르트는 과학의 발달이 진리를 인식하게 할 것이라 믿었지만, 이 역시 진리가 아닌 한낱 믿음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육체에 대한 이성의 통제로 귀결된다.
근대철학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문제는
‘진리에 대한 보증’이다.
주체는 ‘진리를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독립을 달성했으므로, 진리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독립이 철회될 위기였다.
이 여정은 쉽지 않았고 근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골몰하며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인간
중 누구도 진리를 확실하게 보증할 수 없다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유아론의 딜레마’를 낳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진리의 주관성을 역설하는 태도가 나타나 다양한 사고영역을 개척되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근대의 두 번째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데카르트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데카르트가 인간을 주체로 인식하면서 자연을 객체로 보았다면, 스피노자는 자연을 더 근원적인 주체의 위치에 놓는다. 스피노자는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를 가정하는데, 이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인 자연이다. 실체는 무한하게 변용하면서 여러 양태를 만들어내는데, 자연에서 태어난
우리가 바로 각각의 양태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각자는 모두 신의 변용이며 자연의 일부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나 동물, 식물 같은 범주로 한정할 수
없는 세계 안의 모든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는 흔히 상상하는 신의 형상보다 어떤 힘(역량)에 가깝다. 실체로써
자연은 ‘생성 그 자체’이고 스스로 산출하거나 산출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각각 육체와 정신을 지칭하는 데카르트의 용어를 가져와 설명하고 있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사유와 연장은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육체와 정신을 이원론으로 구분하면서 나타났던
문제들이, 스피노자에게는 제기되지도 않는다. 진리를 보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인식 이전에 진리가 이미 있어야 판단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고, 교묘하면서도 획기적인 주장이다.
스피노자는 ‘신’, ‘진리’, ‘이성’을
다른 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스피노자에게 ‘신’이 자연이라면, ‘이성’은
‘관계에 대한 능력’이다.
의미와 용법이 다르니, 과정도 결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근대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향한 여정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스피노자가 주체는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니 주체는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돌아와야 할 판이다. 근대철학도
마찬가지로 시작하자마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고. 후대의 철학자 네그리에게 ‘야만적 별종’이라 불렸다는 스피노자는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식론보다 윤리학에 집중했다는 점도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스피노자의 대표작은 《에티카(윤리학)》이다. 당연히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데카르트의 계몽과 거리가 멀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정신(연장과 사유)을 합일시키려는 ‘코나투스’라는
힘이 작동한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든 말든 코나투스는 생존을 위해 작동한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강렬하게 나타났던 어떤 욕망이 훗날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코나투스의 작동을 믿게 되리라. 가끔 농담처럼 말하지만, 나에게는 이 공간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한 그 힘이 바로 코나투스로 여겨진다.
이성으로 통제하는 윤리학이 아니라 ‘욕망을 긍정하는 윤리학’이라니. 과연 근대의 시작지점에서 탈근대를 발견한 이의 통찰에서 나올
만한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