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탄자니아 강제 촌락화 : 미학과 소형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탄자니아의 우자마아 촌락 캠페인은 아프리카에서 수행된 강제 재정착 계획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대부분 발전과 복지 프로젝트로 실시되었다. 이 캠페인은 하이 모더니즘의 원리인 개량의 논리, 관료주의적 관리, 미학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결국에는 실패했다. 탄자니아의 촌락화의 전제는 동아프리카의 식민지 하이 모더니즘 농업에서 비롯되었다. 동아프리카 지역 샤이어 밸리의 주민 정착과 토지 이용 계획은 표준화된 농업 환경 모델, 경작자에 대한 몰이해로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탕가니카의 땅콩 계획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3년 이전의 탄자니아인의 대다수는 생계형 농업이나 목축에 종사했다. 민족 국가 체제인 TANU는 식민국가의 강제적 규제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지만 농업 정책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니에레레는 사회주의 방식의 농촌 개발을 표방하며 공공서비스 제공, 생산적이고 근대적인 농업을 정책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농민들은 물리적으로 정해진 곳에 이주해야 했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지만 1973년 이후 강제적인 조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니에레레는 ‘작전 계획 촌락’을 기획했다. 국민교육, 적절한 부지 검색, 위치 조사, 촌락 계획과 명확한 토지 분할, 우자마아 방식의 관리자 훈련, 재정착의 6단계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민의 반발과 단기적이고 군사적인 명령이 서로 부딪혔다. 민병대와 군대가 동원되고 강제이주자들이 돌아갈 주택이 불태워졌다. 현지 실정에 어두운 정부 관리의 비중이 높은 곳일수록 촌락화가 늦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강제 이주가 진행된 탄자니아의 촌락들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주택이 도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형태를 띠었다. 밀집된 촌락 주변의 경작지는 촌락민의 개인 필지로 이루어진 블록형 농장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농업 생산량 증진에 도움이 안 되는 방식이었다. 촌락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작물만 재배하고 정부 소유 트랙터가 경작을 모두 담당하게 했다. 강제적 촌락화 캠페인은 농업 생산 감소를 초래했고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대규모 식량 수입이 필요한 지경이 이르렀다. 집단 촌락 농장에서의 노동은 강제 노역과 다름 없었고 촌락 주민들의 노동이 이익을 창출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결국 공동 경작지는 개별 가구의 경작지로 분할되었고, 경작에 대한 책임과 벌칙을 정확하게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공동 경작을 부담스러운 허드렛일 정도로 여겼고 사유 경작과의 생산량은 현저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관료주의적 편의에 의해 규정된 단일 경작과 정렬 방식의 경작은 경작지와 소출에 대한 계산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관료들은 결과가 쉽게 드러날 뿐 아니라 공무원 집단 이익에 부합하도록 촌락을 수치화했다. 70퍼센트 가량의 국민이 3년에 걸쳐 주거지를 옮기면서 ‘실질적인 촌락’은 사라지고 ‘명목상의 촌락’만 존재하게 되었다. 행정 관료와 당 지도자는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촌락을 이용하기도 했다. 탄자니아 촌락 계획의 특징은 속도와 포괄성, 공공 서비스 공급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었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결과는 소비에트 집단 농장화만큼 회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탄자니아는 스탈릭식 방법을 꺼렸으며 농민들의 비공식적 생산과 거래, 밀수와 게으름 피우기 같은 전술적 이점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촌락화 강행에 따른 피해를 다소 적게 발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상적’ 국가 촌락 : 에티오피아식 변형 한 번도 식민지를 경험한 적 없는 에티오피아의 경우 재정착은 제국 왕조 건설을 위한 세기적 프로젝트였다. 3개월에 460만 명의 농민을 4500개의 촌락에 정착시키는 과정은 일종의 징벌적 식민지로서의 측면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탄자니아의 경우보다 강력한 군사적 강제와 폭력이 행해졌다. 지역의 농업과 목축이 확보하고 있던 귀한 지식 유산을 수포로 날렸으며 잉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던 지역 공동체도 대부분 사라졌다. 설상가상 강제 이주와 함께 가뭄이 발생했다. 그들이 식량이 부족한 시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요 수단인 공동유대, 친인척 관계, 호혜와 협력 네트워크, 지역적 자선과 의존이었다. 재정착은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었고 기근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 ‘계획은 현실을 소화할 수 없다.’ - 장 폴 사르트르 하이모더니즘과 권력의 눈 국가 계획은 기본적으로 중앙 집권화를 의미했다. 원근법처럼 모든 것은 소실점까지 권력의 눈으로 수렴되었다. 계획화된 촌락의 활력을 불어넣는 근대주의적 시각의 미학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완성된 그림과 같은 정적인 특성을 드러냈다. 획일적인 촌락은 취약하고 특성이 없었다. 가독성 면에서 그것은 대체 가능한 벽돌일 뿐이었다. 격자형의 실패 하이 모더니스트 엘리트들은 형식적 규칙을 위해 법률적 변화를 재조정한다. 하지만 암묵적 이해나 무언의 조정, 실질적 상호관계의 지속적 변화는 문서화된 법령 속에 포함시킬 수 없다. 파리의 택시 운전기사들은 규정 또는 요금과 관련해서 당국을 압박하고자 할 때, 준법 투쟁 노동 쟁의를 한다. 운전자들이 규칙을 종종 위반하면서 발전시켜온 일련의 관행을 습득함으로써 원활한 교통 순환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을 전술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완벽한 소형화와 통제 계획된 도시, 계획된 촌락 그리고 계획된 언어는 ‘얇은’ 도시와 촌락 그리고 언어가 될 것이다. 복잡한 활동을 합리적으로 계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얇다’. 얇은 계획은 ‘어둠 속의 쌍둥이’라는 일종의 비공식적 현실을 생산한다. 공식적인 브라질라아와는 다른 무질서하고 비계획적인 브라질리아가 탄생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한 도시가 공식적인 도시 자체를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것은 공식적인 도시의 존재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주민을 영구적인 정착 주거지에 유지하고자 하는 강압적 노력은 비합법적 인구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