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맑스, 프로이트, 니체
새로운 개념으로 근대철학을 해체해버린 능력자들
맑스는 ‘실천’을 철학적 개념으로 가져온다. 대상, 현실을 실천이란 형태로 파악하자는 것이다. 대상은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해야 한다. 인간은 선천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된다. “흑인은 흑인이다, 어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가 된다”처럼. 지각이나 감성 또한 대상과 목적을 갖는 ‘활동’이요 ‘실천’이다. 역사 개념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주체, 절대 정신이든 인간이든 간에 그 주체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그것의 변화와 대체과정에 불과하다.
맑스는 실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근대적인 문제설정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근대철학을 벗어나는 개념들과 사고 방법을 포함하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영향이 아직 독일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시대, 산업혁명이 독일에서 아직 본격화되지도 않았던 시대를 살았다. 자본 1권 서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론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가공하려는 맑스의 힘겨운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근대적 개념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사고방법을 설명하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프로이트 또한 새로운 개념의 발견으로 근대 철학의 기반을 해체한 사람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것이 우연적인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까지 발견했다. 무의식 자체 내에 분열이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의 기초를 해체해 버린다. 이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다.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란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이고,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프로이트의 발견은 철학의 영역 밖에서 행해졌지만 ‘주체철학’이라는 근대 철학의 지반을 철저하게 허물고 깨뜨려버렸다.
니체 이전까지 철학의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니체는 ‘어떤 진리인가?’라고 묻는다. 니체는 ‘선’이니, ‘진리’니, ‘도덕’이니, ‘인간’이니 하는, 대개는 의문 없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그런 관념의 혈통과 ‘계보’를 찾아가서,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에서 시작되었거나 끔찍한 것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여준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나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본다. 니체는 힘과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핵심 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는 니체에게 결코 자명하지 않다. 오히려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은 당연히 힘에의 의지다. 자명한 확실성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애초에 의지가 작동하는 가치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또한 출발점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다. 니체의 비판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다.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고 하는가?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칸트에 의해 완성된 근대적 윤리학, 즉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칸트는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를 따르기를 원치 않을 때, 신이나 국가나 아버지를 따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한다고 한다. 실천이성이 바로 이 새로운 복종을 지휘하는 군주이다. 외부의 강력한 권위가 무너지자 새로이 권위를 내부에 옮겨 심은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결국 우리를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설득하는 작용일 뿐이다. 복종 속에서만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나타나게 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근대적 문제설정의 지반이었던 주체와 진리를, 그리고 그에 기반한 윤리학까지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 셈이다.
맑스, 프로이트, 니체에 의해 근대적 자명한 주체가 해체되고 확실한 대상은 사라졌으며, 진리는 진리들이 되었고, 나도 세상도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맥락에 따라 언제든 변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정된 ‘나’와 정확한 ‘지식’을 찾으려는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이 목격된다. 근대라는 시간은 중첩된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도입과 발견이 근대를 해체해 버린 것이라면 결국 주체도 진리도 개념에 따라 달라지는 형태로 변이했을 뿐이다. 이제 사유의 도구인 개념과 언어를 분쇄할 차례이다. 과연 모든 것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분쇄한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있을지, 그 때 인간은 어떤 형상일지 따라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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