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3장 장거정 없는 시대, 4장 산 조종 이 책의 저자 레이 황은 만력제의 키워드를 태업으로
꼽는다. 신하는 일하기를 원치 않을 때 사직할 수 있지만, 황제는
사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신하들과 대차게 기싸움을 벌일 만큼 담이 크지도 않았던 만력제는 저항의 방식으로
태업을 선택한다. 중원을 통치했던 역대 왕조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장장 30년에 걸친 태업이었다. 자고로 태업은 을의 방식, 더 약한 자가 선택하는 투쟁의 방식이다. 한 국가를 지배했던 황제가
태업으로 무언가에 저항하였다고 하니, 그 정황이 더욱 궁금해진다. 레이
황은 황제의 태업이라는 이 초유의 사태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황제가 태업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폭군이 된 군주의 이야기는 흔하지만, 태업을 하는 군주의 이야기는
접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에게 군주의 태업은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보통 군주가 폭군이 되는 이유로는 타고난 성정과 복잡한 개인사가 꼽힌다. 만력제가
태업을 선택한 이유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이를테면 타고난 게으름이나 개인적인 불행 등이 겹쳐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거나 하는. 만력제의 어린 시절부터 황제가 되어 태업을 선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보여주는 레이 황의 시선은 굉장히 복잡하다. 그 시선 속에서 400년도
전에 죽은 황제는 제국의 군주보다 외롭고 심약한 한 개인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명은 유가의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유가의 도덕은 법률이나 황제의 권한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했으므로, 법률이나
황제의 권한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명의 문관들은 ‘사서’를 통한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문관
중 일부는 황제를 가르치고 보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논란의 인물이었던 장거정의 사후에 문연각의
대학사 신시행은 황제의 스승인 ‘수보’라는 위치에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문관들의 역할이 나뉘고 여러 이해관계가 중첩되면서 문관들은 분열과 갈등을 거듭했다. 선대의 황제들이 지배질서로 도덕을 세우기 위해 신하들의
표준이 되었다면, 겨우 아홉 살에 황제가 된 만력제는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처지였다. 신하들은 어린 황제를 무시하거나, 황제의 신뢰를 받는 이가 황제를
속이고 있다고 서로를 모함했다. 모함 중 일부는 설득력이 있어서 황제는 자라면서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명의 정치시스템은 황제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하여 폭정을 하거나, 황제의 일가들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지나치게 약화되는 일을 막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성장한 어린 황제는 어느 순간 정치에 의욕을 잃어버렸다. 황제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의
정치시스템은 정치지도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요구하지 않았고, 용납하지도 않았다. 황제의 역할은 문관들의 갈등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정해진 의식을 주관하는 데 그쳤다. 개성과 자율성을 드러내는 황제는 신하들과 갈등을 겪고,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경서를 떠받들며 문관들이 중심이 된 명의 사회는 변화 대신 질서를 강조하면서
점점 더 경직되어갔다. 신하들과 갈등관계에 놓였던 명의 황제는 만력제 말고도
또 있다. 만력제의 작은할아버지뻘이 되는 정덕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금성에 갇혀 있기 싫어했던 정덕제는 일찍부터 자금성을 떠나 무관들의 일에 흥미를 보였다. 스스로를 무위대장군이라 칭하며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덕제
만큼은 아니지만 만력제도 자금성을 벗어나 병법에 관심을 가지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 물론 이 시도는
문관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어릴 때 장거정으로부터 서예를 금지당했을 때처럼 만력제는 조용히 의견을 접었다. 삶 전반을 통제당하다시피 살아온 만력제는 자신이 원하는
아들을 태자로 세우는 일 역시 실패한다. 문관들은 만력제의 의도에 강하게 저항했고, 만력제는 신하들이 두려워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만력제가
총애한 귀비의 아들은 태자가 되지 못해 멀리 떠나야만 했고, 귀비는 죽어서 만력제의 곁에 묻히지 못했다. 자신을 떠받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삶을 세세하게 통제하는 관료들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만력제는 장기적인
태업을 선택한다. 레이 황이 본 만력제의 키워드가 태업이었다면, 신시행의 키워드는 무능이다. 신시행은 장거정의 사후 중요한 시기에
만력제를 도운 수보였다. 만력제의 태업은 신시행의 재임기간부터 시작되었다. 능력이 출중하진 않으나 사람들과 무리없이 잘 어울리는 탓에 수보의 자리를 유지했던 신시행도 황제와 관료들 간의
미묘한 대항관계를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신시행은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며 자신의 수보
시절을 회상하는데, 평가는 예상보다 후했다. 신시행은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신시행은 태업을 시작하기 전 아직 정치를 진중하게 대하던
만력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진중함이 지속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지만, 신시행 역시 만력제로 하여금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신시행은 거의 멈춰있었던 황제의 업무를 보좌하면서 미룰 수 없는 국가의 긴박한 업무들을 돌보았다. 특히
북방 이민족의 침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만력제가 전쟁을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도왔다. 이 정책은
단기적으로 성공한 듯 보였지만, 후에 청의 중원 지배를 돕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능한 신하와 태업하는 황제는 서로를 진심으로 애틋하고
안타깝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무능한 신하가 있으니 황제가 태업하기 쉬웠을 테고, 황제가 태업을 하니 신하가 무능해도 상관이 없었을 테다. 레이 황은
이 두 사람이 드물게 의욕을 가지고 해낸 사업으로 능묘 조성을 든다. 만력제는 스물도 되지 않은 이른
나이에 자신의 묘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신시행이 이 사업을 제안하고 담당했다. 능묘 조성이 시작된 이후 죽음까지 수십 년 동안 만력제의 삶을, 레이
황은 ‘정신상의 생매장 상태’(223쪽)라고 표현한다.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태업을 선택한 황제는 이미
살아있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었다. 거대한 묘는 황제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국가기구 자체로 간주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생매장 상태에 있으면서도 황제는 자신이 국가 내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