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R&D <생동하는 물질> 5장 생기론도 기계론도 아니다 _ 발제
물질은 물질이고, 개념은 개념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우주(자연)를 활기가 넘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가능성의 세계로 바라보는 생기론은 20세기 초반 태동했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드리슈의 <유기체에 대한 과학과 철학>이 큰 역할을 했다. 생기론자들은 자유롭지 않고 기계적이고 결정되어 있는 물질 개념에 ‘생명’이 가진 특성을 추가했다. 유물론자들이 기계적이고 물리-화학적인 방식으로만 물질을 설명하는 것과 대조된다.
물질은 전적으로 물질적이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것인데, 드리슈는 이를 ‘생명력’으로, 베르그송은 ‘생의 약동’으로 설명했다. 칸트의 ‘형성충동’ 개념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유기체 내에서 작동하지만, 죽은 물질에는 없는 ‘형성하는 힘’에 대해 언급한다. 형성충동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 내에는 없으나 유기체 내에는 존재하는 불가해한 자기-조직적인 힘을 뜻한다.
형성충동은 영성으로 충만한 칸트의 철학에서는 거의 불가사의하고 골치아픈 개념이다. 형성충동은 물질로부터 분리된 영혼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영혼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반면, 형성충동은 오직 신체 속에서만, 기계적인 활동이 있어야만, 뉴턴이 말하는 충동하는 활동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의학 교수인 블루멘바흐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블루멘바흐는 뉴턴의 중력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려하며 형성충동 개념을 모델화했다. 모든 물리적 체계에 적용되면서도 어떤 목적을 지닌 불가해한 고유한 힘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형성충동만으로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칸트는 형성충동이라는 개념으로 물질과 생명 사이에 어떻게든 질적인 간극을 만들어놓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은 물질을 무력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했고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바라봤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죽은 물질과 살아 있는 존재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격동적이고 생산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이탈하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는데, 뉴턴의 세계에서 모든 작용이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형성충동은 어쨌거나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을 결합하고 있기에,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하고자 했던 칸트 철학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드리슈는 칸트를 따라 씨앗이나 배아에 내재하는 특정한 성질처럼 제한되어 있지만 생기적 능력인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생명력은 비물질적이고 비공간적이며 기계론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정신적이거나 영혼적인 것도 아니다. 식별은 할 수 없지만 활력을 불어넣는 무언가, 그것들을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그때나 지금이나 이분법에서 벗어난 사고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설명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실체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닌 생명력은 ‘생명 현상을 유발하는 비기계론적 행위자’를 말한다.
생명력은 창발하는 유기체 내부에서 수많은 형성의 가능성 중 무엇을 현실화할 것인지 결정한다. 그러나 이후의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들의 근원을 창조할 뿐이며, 이후의 모든 반응은 세부적으로 결정짓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는 불확정적이지만 원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형태를 형성하는 움직임으로서의 생명력은 그러나 ‘에너지’로 양화할 수는 없다. 생명력은 ‘관계의 질서이고 절대적으로 무’다.
드리슈는 물질을 수동적이고 활기가 없는 기계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개념 안에서 가둬놓고 있으니, 물질을 생명력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베르그송 역시 생명과 물질 사이의 구별에 기반을 두고 물질을 무력한 것으로 바라보는 전통에 서 있다. 세계를 고정된 사물들의 계산 가능한 집합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피할 수 없는 성향이다.
베르그송은 활기가 넘치고 무언가를 촉발한다는 생명력의 개념을 더 강조하며 ‘생의 약동’이라는 내적 방향의 원리를 주장한다. “생명의 근본에는 물리적 힘들의 필연성에 가능한 많은 양의 비결정성을 덧붙이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 드리슈의 생명력을 ‘강도적 다양체’라고 한다면, 베르그송의 ‘생의 약동’은 ‘다발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생기적 추동력의 자기-다양화 과정이다. 생의 약동이 자신의 고유한 활동에서 하는 일은 물질적 형태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물질 속에 비결정성을 삽입하는 것이며, 그 결과 생명이 창조하는 형태들은 비결정적인, 즉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된다.
예측할 수 없는 예술작품처럼 생의 약동은 “자신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성에 좌우”된다. 베르그송은 조화로운 전체의 생성을 막는 몇몇 장애가 생의 약동 그 자체에 내재하며, 이 장애는 곧 생의 약동 자체의 조화되지 않은 다양성이 가진 하나의 기능임을 강조한다. 생기적 충동은 여러 경로로 흩어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보다 비결정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의 약동은 자기-배제적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언제나 불화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초월하려 애쓰며 언제나 자신이 산출하려는 작품에 꼭 들어맞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생명력과 생의 약동 개념은 물질로 환원할 수 없지만 역동적이고 활기 있는 뭔가를 말하고 있다. 이 둘은 모두 물질을 생산하고, 조직하고, 보다 활력 넘치게 만드는 생성 권력을 의미한다. 이런 생기적 힘의 형상은 역사 내내 이어져온 ‘영혼’의 형상과 너무도 닮아 있다. 물질에 깃든 영혼, 영혼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물질. 이 둘 사이를 화해시키는 위한 철학자들의 개념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인 모양이다. 물질이 기계적이지 않고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다. 물질은 이미 생동하고 있는데, 인간만이 고정된 세계를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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