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무섭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에레혼 2020년 가을, 나는 중국으로 향했다. 홧김에 내린 결정이었다. 중국행 비행기표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질러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중국을 여러 번 오간 적 있었지만, 코로나가 번진 중국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공항은 방역복을
입은 직원으로 가득했다. 수차례에 걸친 문진표 작성과 검사결과를 거쳐야 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방역버스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세네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어쨌든 바깥으로 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그제서야 사람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진행되는 양상은
비슷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신가요. 중국에 왜 들어오셨나요. 대부분은 중국에서 생업이나 학업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참
대화를 엿듣다가 스치는 생각은 ‘충동적으로 올 중국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각해지자 중국은 2020년부터 외국인의 입국을 막았다. 겨울방학이나 휴가를 맞아 본국으로
돌아갔던 외국인들은 하루 아침에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행 비행기표를 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중국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뚜렷한 목적과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웬수 같은 중국”, “이놈의 중국”과 같은 말을 되뇌었다. 당시 경험은 중국 혐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중국과 관련된 “업계 사람”이라면 혐오 담론 유포에 신중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중국은 미지의 세계처럼 인식되는 추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권위있는 발언처럼 확대∙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중국 관련자”의 발언은 선택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중국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설명은 여러 번 다시 이야기해도 늘 새로운 이야기 취급받는다. 하지만 듣는 이가 중국을 오해하고 싶어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호응하는 대답을 할 경우에 그 효과는 배가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주변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의도가 담긴 질문을 하면 절대 그 의도대로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다. 예컨대 “중국 사람들이 요즘 한국 많이 싫어하나요?” 하는 질문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 아닐 때가 더 많다. 이 물음에는 나에게 혐오의 증언자가 되어 달라는
의도가 숨어있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중국 교민이나 유학생 커뮤니티에 접속할
때마다 피로를 느꼈다. 이런 커뮤니티에는 자신이 중국에서 느낀 감정을 중국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으로
바꾸어 말하는 게시글이 가득하다. 이런 글은, 중국을 직접
경험한 사람일수록 중국에 대해서 단정적인 이야기를 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하기에 충분했다. 이 모든 생각은 내가 직접 중국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국에 대한 ‘책임 있는 발언’을 쉽게 강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스스로가
이해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외 생활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영역과 늘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2020년 이후 중국은 격리와 봉쇄라는, 개인이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짱깨주의의 탄생》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만, 2020년은 새로운 짱깨주의가 탄생하는 원년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중국을 오고 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주에 걸친 격리를 감내하며 한중 양국을 오가야
하는 사람들, 봉쇄를 피해 한국으로 왔지만 다시 중국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중국에서 겪은 어려움 때문에 중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생긴다고 해서, 그러한 인식의 오류를 비판하기란 어렵다.
혹은 이 오류를 바로잡겠다고 이러한 “증언자”들에게 올바른 중국 인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인가? 팬데믹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 업계 사람”이 중국에 대한 지식을 더 이상 필요로 하게 될 지가 미지수이다. 《짱깨주의의 탄생》을 읽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사실이 하나있다. 중국 혐오를 전시하고 유포하는 사람들도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책이 손을 뻗어야 할 대상 역시 “평범한 짱깨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슨 수로? 중국에 대해 가장 친숙해야 할 사람조차 중국에
대한 모든 요소를 거부하고 있는 현시점에 “《짱깨주의의 탄생》 신드롬”은 타겟독자와 제대로 만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책을 펴자마자 허무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이야기가 공허한 울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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