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리딩 R&D] 생동하는 물질 8장 발제2022-11-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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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동하는 물질] 8장 생기와 자기이해 

                                                                        2022. 11. 02 걷는이

 

 

환경주의와 생기적 유물론은 서로 다른 정동을 불러내고, 서로 다른 공중을 촉발한다. 환경주의자가 자기를 지구 위에 사는 존재로 여긴다면, 생기적 유물론자는 자신을 지구로서, 다양한 물질의 역량과 한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존재로서 여긴다. 어떻게 인간이 비인간의 공공활동, 정동, 효과에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가? 생동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단지 우리가 체화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신체들의 배열이며, 중첩된 일련의 미생물군 유전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신체들이다.

 

 

세 가지 생태학에서 가타리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환경의 붕괴가 아니라 세 가지 생태학적 작용 영역인 환경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신적인 것 모두를 괴롭히는 질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인간 자연과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관계 맺기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한다. 가타리는 인간이 자연의 내부에 있는 존재이자 자연 그 자체의 존재이며, -부이자 외-부가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정식화한다. 그는 인간과 비인간의 분리를 문제 삼으며 횡단하는 지각 양식을 요청한다. , 기계권, 사회권, 주체성의 내부사이의 상호작용을 횡단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자아는 자연으로부터 점점 분리되고 있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비인간 자연과 얽혀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뒤얽힘의 현상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차적인 자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차적 자연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이 실은 자연에 대한 문화적 규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생기적 유물론자들은 문화란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생물, 지리, 기후의 힘이 작용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 힘들은 우리 안에 침범한다. 라투르는 우리가 인간이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비인간성이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보다 더 잘 수용한다고 주장한다. 가타리는 주체성, 사회, 기계 사이의 경계의 투과성을 인정하는 정치를 요청하며, 자연에서 문화를 골라내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들과 더 정중히, 세심하게 관여하도록 노력하라.

 

 

인간과 동물, 식물, 무기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존재론적 장에서는 모든 힘과 흐름은 활력이 넘치고 정동적이며 어떠한 조짐을 내비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분화는 변화무쌍하고 다양하여 생명, 물질, 정신, 환경이라는 철학적 범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목적론적인 물질로서의 자연과 생성으로서의 자연 사이의 대조는 스피노자의 소산적 자연능산적 자연사이의 구별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 소산적 자연은 창조 질서를 따라 조직된 수동적인 물질이고, 능산적 자연은 끊임없이 생성하는 자존하는 인과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자연은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요소들과 재료들이 춤을 추는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창조적이면서도 완전히 인간만은 아닌 힘은 자연이라는 용어가 쓰여온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제인 베넷은 물질의 생기가 실재한다고 믿지만 그것을 식별하고, 그것에 계속 집중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고 말한다. 생기는 언제나 되어가는 과정에 놓인 움직임이며, 의도적인 것만은 아닌 흐름이다. 물질의 생기는 나 자신이자, 나에 앞서고, 나를 초월하며, 나 이후에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생동하는 물질의 철학을 정교화하는 것은 자기의식적이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아닌가? 라는 합리적인 반대의견을 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왜 우리는 인간의 자아를 물질의 장과 구별하려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생기적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제인 베넷은 지구를 가볍게 밟기라는 윤리적 격언의 근간이 단단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나와 존재를 공유하는 다른 사물들의 손상과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 행위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 모든 것에 공통된 물질성을 강조하리라는 것. 자아와 자기 이해를 새로이 개척하리라는 것. 그것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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