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루의 바다로 다이빙하는 까닭은
1. 광장이라는 감각의 밀도
현실의 감각이 모든 것을 압도할 때가 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넘실대는 혐오는
시대 정신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느껴지는 무력함을 깨부수는 힘은 대면의 순간으로부터 발생한다. 다른 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은 온라인의 극단적 목소리가 과잉 대표된 대안 현실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연루됨》의
저자 조문영 역시 만남의 각별함을 이야기한다.
직접적인 접촉이 어려워졌을 때 발생한 물리적 마주침은 때로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는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그랬다. 「링」의 장면을 소환할 만큼 당혹스러웠지만, 다행히 「링」을 처음 본 순간처럼 두렵진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익숙한 풍경을 뒤집고 관행을 들쑤시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이 긴장이 견딜만한 가치를 갖게
된 건 얼굴과 이름이 둥둥 뜬 화면에서 말이라도 눈빛이라도 섞은 덕택이 아니었을까. (본문 22-23쪽)
저자의 경험담을 읽으며 한편으로 위로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감을 느낀다. ‘물리적 마주침이
유발하는 묘한 긴장감’이라는 구절은 데자뷰마저 느껴지는 감정의 묘사이다. 나도 작년 12월 광장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드는 기시감이다. 계엄 규탄과 탄핵 찬성을 위해 여의도에 모인 이들의 모습은, 내가
그동안 SNS에서 만나온 ‘트위터 한줌단’이 정말 큰 단위의 한줌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연대가 필요한 의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한줌단. 그들은 적극적으로 혐오를 자행하는 문화를
광장에서 배척하고자 했다. 여성 혐오 가사가 들어간 민중 가요를 플레이리스트에서 배제하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의 목소리와 퀴어 활동가의 규탄 성명에 귀를 세웠다.
온라인에서 소수자에 대한 악플과 그들에 대한 비난성 보도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일까. 자유
발언을 들으며 조마조마했다. ‘이쯤되면 야유가 나올 법 한데’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광장의 사람들은 연단에 오른 이들의 이야기에 큰 호응을 보냈다. 정상성만이 환영받던 몇 년 전의 광화문 광장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며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2. 연루자들은 어떻게 조롱받나
근래 인류학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거부의 정치’를 목격중이다. 반복되는 억압, 통제, 폭력, 낙인에 지친 원주민, 홈리스, 여성 등은 연결 대신 단절을 선택하고 거부 행위를 함께 실천하는 ‘우리’ 안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본문
31쪽)

긍정적 면모를 과도하게 부각해서 본 것이었을까. 아니면 시위 규모가 커지며 이전에 부각되지
않던 일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일까. 광장에서 연대를 위협하는 존재들이 간혹 보이기 시작했다. 위 캡쳐의 상황이 대표적인 논의를 전달하고 있다. 이번 윤석열 규탄
시위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가 수많은 깃발의 등장이다. 깃발에는 계엄과 정치권에 대한 비판부터 소소한
이야기, 자신들이 덕질하는 것에 대한 홍보, 밈과 패러디
등 다양한 문구가 담겨있다. 그런데 3월 중순경 집회에서
이러한 기수들을 같은 탄핵 찬성집회 참가자가 차도로 떠미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피해를 입은 기수들은 다양했지만 소수 정당 소속이거나 성소수자 의제를 깃발에 새기고 나온 이들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였다. 온라인 여론 조작이라고 믿고 싶지만, 문제 발생 당일 기수들을 밀어버리니
속 시원했다는 말을 내뱉는 이들도 보였다. 이들이 실토한 가해자가 된 이유란 단순했다. 소수자 정치가 꼴사나워서, 혹은 내 소속 집단을 그들이 비판하니까.
소수자와 한줌단들은 다양한 의제를 두고 연대한다. 그래서 ‘이 시위, 저 시위, 그
시위 각각 10명이 참석했어도 모든 시위의 참가자 수를 합치면 30명이
되지 않는’ 기적의 계산법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연대를
위선이며 가식이고 노선을 흐트러뜨리는 비효율적 전략이라고 욕한다. 그리고 더 나아간 누군가는 이러한
연대체의 범위를 마음대로 확장한 뒤에 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오늘날 극우화 된 인사들이 반대하는 것은 ‘진보-민주당-차별금지법-여성주의-권위주의(억압)-중국-공산주의-북한’이라는 개념들의
연속된 사슬이다. 이 사슬을 묶는 과정이 지난 정권 내내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를 반대하면 나머지 전체의 사슬을 반대하도록 조직화 하는 게 최근 극우화의 방식이며 통로이다. (김민하, “젊은 남성에 대한 극우화 착시”, http://weirdhat.net/blog/archives/8778)
연루된 이들의 공동체는 어떤 이에게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할 대상이 되는 셈이다. 연루자들을
사슬로 묶으려는 이들은 선명성을 강조한다. 극우 집회의 자유 발언대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가 ‘저들의 복잡다단함’을 비판하는 발언이다. ‘빨갱이들은 시위 구호도 통일되지 않아서 보기 좋지 않더라’ ‘의견도
통일되지 않는 탄핵 찬성 집회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어긋난다’ 운운.
상대방을 선명하지 못한 존재로 타자화하는 일은 혐오를 위한 예비 작업이기도 하다. 혐오의
생성 과정에서 이해하기 싫은 존재가 알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합산이었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연대하는
개개인의 인간띠만큼이나 혐오의 구조화도 나름대로 단단하게,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 연결고리는 결국 이어지기
마련
전체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복수의 세계에 주목하자는 제안은 세상 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저마다의 세계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들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으며 관계할 것인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본문 2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대와 연루의 힘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물론 연대나 연루라는 단어는
힘보다는 부드러움과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부드러움이 결국 저
직선적이고 선명한 이들보다 오래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연루의 말랑함은 유연하고 느슨해서 누군가의
확성기 소리에 의해 지워지기 쉽지만 늘 그 자리에 있다. 내가 12월에
광장에서 목격했던 수많은 경청하는 군중들도 언제든 다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약하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존재들이 아니었을지.
아마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으리라. 안온, 무해, 다정이라는 단어에 ‘극혐’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세상에서 따뜻한 감정이 결국 승리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어구가 아닌가 하는 불만
말이다. 그러한 볼멘소리에도 무지와 혐오를 탈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접촉하여 느끼는 감정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연루됨》을 읽으니 든든한 아군이 생긴 기분마저 든다.
중국을 연구하는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중국에도 사람이 살고 있어요’ 이 한마디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도, 동덕여대에도, 퀴어 퍼레이드에도 사람이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목도한 동료시민들이 존재함을 몰랐다. 《연루됨》을
읽는 것은, 그리고 광장에서의 마주침은 연루의 고리가 흐릿하지만 굳건하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