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자신의 이야기(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와 성별성) 1/2 - 요약 발제: 희음
할리우드의 여성들: 간략한 역사 2000년대 할리우드 영화 중 여성 감독 비중의 빈약함과 다르게,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 초기에는 여성 감독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알리스 기-블라세와 로이스 웨버 등 무성영화 시대에 활동한 감독은 12명 정도로 집계된다. 여성에 대한 장벽이 생기기 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성영화의 발전에서 가부장적인 요소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유성영화로의 진입은 제한되었다. 유성영화로의 산업적, 재정적인 면에서의 재편이 성별상의 사회적 편차를 보다 광범위하게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사학자와 비평가들이 스튜디오 시대와 바로 연이은 시기에 활동한 여성 감독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도로시 아즈너와 아이다 루피노 두 명밖에 없었다. 여성운동의 절정기에도 뉴 할리우드(60년 후반~70년대)가 여성의 재능을 받아들이는 데 개방적이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장르와 성별성: 여성영화와 그 너머 스튜디오 시대의 할리우드는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하나로, 여성 관객용 영화를 특화시켰다. 여성 문제와 여성의 경험에 대한 관심,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것과 같은. 여성 관객용 영화는 스타일과 서사의 왜곡이 두드러진다. 베이신저는 “여성영화는 하나의 역설로 작동한다. 사회적 속박으로 여성을 옥죄면서 동시에 잠재성과 자유를 향한 꿈으로 그들을 해방시킨다.”라고 말하면서 여성영화에 있어 어떤 환상을 끌어들이는 데 로라 멀비보다 더 적극적이다. 일부 학자는 여성 관객용 영화와 프로덕션 코드(30~60년대 할리우드의 도덕성/이데올로기) 간의 연관성을 가정한다. 스티브 닐에 의하면 섹슈얼리티에 대한 프로덕션 코드의 규정은 신여성의 근대성을 19세기의 가치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제2물결 페미니즘이 도래하면서 여성 관객용 영화라는 용어는 프로덕션 코드와 함께 사라졌다고 그는 말하기도 한다. 멜런캠프는 할리우드 영화는 로맨스가 중심이며 여성이 로맨스를 통해서 가족에 편입된다고 주장한다. 페이드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커플이 맺어짐과 동시에 사라지는 섹슈얼리티. 멜런캠프는 연속성 스타일이 남성과 여성을 위한 다른 관습들과 더불어서 성, 인종, 연령의 이중적인 기준을 재현하고 창조한다고 말한다. 클로즈업, 여성 고정 장치 등. 보다 넓게 보면 할리우드의 여성 관객용 영화는 이성애 중심적 사회성이 지닌 위기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것은 불안정한 헤게모니이다. 평등주의적인 이성애의 이미지는 만족스러운 동성애 이미지만큼이나 드물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영화의 시초: 알리스 기-블라세와 도로시 아즈너 알리스 기-블라세의 여성 등장인물은 신여성(1890~1920년대)에 좀더 가까우며,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1950년대 초기 무성영화 형식)에 등장하는 능동적인 여주인공에 가까웠다. <두 동강 난 집안>(1913)은 중산층이 결혼에 대해 갖고 있었던 감상적인 생각을 은근히 비꼰 작품이다. 영화는 계급과 성의 구분 선상을 따라서 나뉘고 연결되는 하나의 틀(door-frame)이 된다. 도로시 아즈너는 그 자신이 남성 세계에서 성공한 여성의 영웅적 사례이지만, 그의 삶과 예술로 선택한 환경은 여성의 세계였다. 아즈너 영화는 ‘눈물로 낭비한 오후’(몰리 헤스켈)의 표본이지만, 그 영화들 중 다수는 작가, 안무가와의 협업 과정을 통한 정형화되지 않고 유쾌한 여성들의 우정과 공동체를 그리고 있다. 아즈너의 작품은 70년대 초반 이래 여성주의 비평에서 시금석이 되어왔다. 아즈너의 영화는 여성주의 대항 영화의 시초, 여성 담론을 복원하려는 할리우드의 능력의 예증, 레즈비언 작가성의 한 예 등으로 해석되었다. 존스턴은 아즈너 영화의 ‘분열되고 파편적인 서사’는 아즈너의 여성 담론이 지배적인 할리우드의 가부장적 담론과 경합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댄스, 걸 댄스>(1940)에서 주디의 성난 발언에 대해 존스턴은 이 순간이 영화의 구조에서 어떤 파열(지배 담론과 여성 담론 사이의 결정적 단절)을 일으키는 순간이라고 판단한다. 주디스 메인은 다른 지점을 본다. 존스턴의 주장은 레즈비어니즘을 일소하는 대가로 이뤄진 것이라고. 그는 무용수들이 남성뿐 아니라 여성 응시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여성의 응시는 영화를 지배하는 동성 사회의 세계 내에 위치해 있다. 메인의 주장은 퍼트리샤 화이트(1999)의 ‘팜 영화’(역사적인 관람 상황에서 (여성의) 동성사회성은 레즈비어니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어떤 조건으로 기능)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장르, 예술을 만나다: <여자친구들>과 <연애 편지> 클라우디아 웨일의 <여자친구들>(1978)은 1970년대 여성주의가 직면했던 역설적인 도전들 중 하나를 묘사한다. ‘성 해방’ 분위기는 동성애에 대한 열린 담론을 가능케 했지만, 이성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레즈비언 로맨스를 여성 간의 우정과 구분하여, 여성 간의 유대를 방해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영화 결말로 쓰이는 프리즈 프레임은 70년대 미국 영화에서 한때 유행한 기법으로 ‘새로운 리얼리즘’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러프티는 이 영화의 자연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지나치게 단순한 카메라 움직임을 언급한다. ‘물신적인 고착이나 개념적 추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한 재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의 여성주의와 특별한 공명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잔느 딜망>(1975)의 극사실주의적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여자친구들>은 미국의 주류영화의 장르와 서술 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변화시키고 유형화하면서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험 양식과 고전 양식 간의 틈새’(앨새서)에 놓여 있는 것. 에이미 존스의 <연애편지>(1983)는 고급 시장에 대한 야심을 가진 익스플로테이션 영화사와 여성주의의 놀라운 명성으로 제작된 수정주의 여성영화다. 영화 속의 상충되는 장르적 지향(<향수>, 존 버거, 발터 벤야민, <지상에서 영원으로>, 노골적 섹스 장면-성 해방)은 관습적인 여성 관객용 영화 서사(어머니의 연애편지 발견)와 결합된다. 주인공 애나의 무의식적 욕망은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나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되길 원하는 동시에 어머니를 독점하길 원하는 모순적 욕망을 갖고 있는 것. 애나는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오이디푸스적 동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난국에 처하게 된다. <연애편지>의 장르적 맥락은 이에 대한 극복과 관련이 있다. 낭만적 여성영화를 거침없는 성적인 표현으로 새롭게 만든 것. 그러나 그것을 감정의 영역과 이성애 관계 영역으로만 국한시키고 있다. 또한 애나의 남성적 동일시로 얻은 것들은 모두 부정적인 것들(경쟁, 질투, 관음증 등)이다. 애나의 꿈에 등장하는 총 역시 열정의 약호가 아닌, 지배당하는 남성과 동일화된 여성을 위한 또 다른 장르적 지평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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