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전론>
에레혼
<지구전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래된 중국 소설 작품으로 운을 띄워볼까 한다. 한 시골 마을이 있다. 이가장(李家庄)이라는 이름의
이 마을은 돈을 많이 가진 인물에 의해 대소사가 좌우되는 곳이다. 공산주의자 샤오창(小常)은 이 마을의
‘모순’을 개선하고자 하는 인물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무엇이든 다 똑같이 나누고 내 것 남의 것 구분 안 하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이 작품은 항일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당시 정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다음 구절은 왕안푸(王安福)라는 중간 계급의 인물에게 샤오창이 항일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지금 그(왕안푸)는 샤오창이 자신이 사는 땅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땅을 잃은 후, 도처에 일본인들이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그 땅 안팎에서 항전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게다가 몇차례가 되었든 반복하여
전투를 할 수도 있으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적이 지쳐서 패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는 샤오창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이러한
고생은 생각지도 못했으며 정말 달갑지 않다고 여겼다. 자오수리(赵树理), 《이가장의 변천(李家庄的变迁), 1945》
하지만 이내 왕안푸는 샤오창의 논리에 설득되어 ‘후세 사람들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는 말을 하며 공산계열 조직에 가입까지 하게 된다. 왕안푸의 변화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던지게 된다.
1942년 ‘옌안문예좌담회’에서 마오쩌둥이 “대중을 위한 혁명 문예”를 강조한 이후로 중국 문학에는 이런 작품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가장의
변천》도 ‘마오의 문예 노선’을 철저하게 따른 작품이기 때문에 ‘무슨 내용 전개가 저런 식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샤오창이 왕안푸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구전’의 논리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왕안푸처럼 쉽게 설득되는 타입이었다면 마오쩌둥은 굳이 <지구전론>이라는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지구전론>을 발표한 것은 1938년으로, 대장정을 시작하던 때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4년의 시간동안 마오는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는 중국 공산당의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대장정에 오르기 전과 유사한 점은 여전히 그의 의견에
불만을 표출하고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모택동이 지구전을
설파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 두 가지 변수는 적의 기세와 국민당과의 의견 불일치였다.
일본의 군사력이야 당면한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당은 이미 공산당과
손을 잡은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국공합작은 항일에 대한 중국 민중의 요구 아래서 이뤄진 것일 뿐, 실상은 서로의 이해타산에 의한 협력이었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전멸을
피하기 위해 국민당과 힘을 합쳐야만 했고, 국민당은 국공합작이 공산당을 통제할 기회라고 여겼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니 공산당 측에서 피력하는 지구전에 국민당이 순순히 협조할 리 없는 것이다.[1]
이런 상황 속 국민당 내부에서 나온 목소리가 바로 “망국론”과 “속승론”이었다.
망국론은 왕징웨이를 필두로 하는 국민당 친일 세력들의 주된 논지였다. 이들은
초반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온 기세, 당시 일본 군대의 전력을 보고 일본과 더 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망국론자들의 내세우는 근거가 역사적 사건─작지만 강한 국가가 약한 후진국을
점령했던 사례들─을 잘못 끌어오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와 상반된 입장인 속승론은 주로 장제스 일파, 심지어는 공산당 일부에서 내세운 것이다. 속승론자 중 국민당의 경우는
동맹국가들이 시일내로 중국을 원조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공산당의 경우에는 국민당 군사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속승론은 객관적인 상황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지구전만이 당시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세라는 것이 마오쩌둥의 주장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놓고 전쟁의 유불리를 따지며 “왜
지구전을 택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내린다.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하며 적들은 퇴보적이고 우리는 진보적이다. 또 적은 작고 우리는 크다. 적은 도의를 잃고 원조자가 적으며 우리는 도의가 있고 원조자가 많다.”[2](99-102)
<지구전론>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일본의 강점은 오로지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117), 일본의 전세가 약해질 때를 도모하였다가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 대한 비교에서 주목할 것은 마오의 중국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이다. 예컨대
중국이 봉건적 상황을 탈피하여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자국을 진보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오의 발언에서 자주 나타난다.[3]
공산당의 평가대로라면 장제스는 지구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있어 분석적이지 못한 인물이었던 반면 마오쩌둥은
이 전략을 어떻게 수행할 지에 대해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구전의 전개를 “침공에 대한 방어─상호 대치─아군의 반격과 적의 후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또한 마오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공산당 특유의 전복적 사고[4]를
엿볼 수 있다. 일본군이 점령 가능한 지역이 중국 전체 영토의 절반도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논의에서
출발하여, 항일전쟁에서 과거의 문화적 낙후 지역을 문화적 중심지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도출하는
부분은 공산당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단순히 전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지구전에 대한 논의는 지구전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와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논한 뒤, 지구전을 수행하기 위한 열 두가지의 강령을 제시한다. 이 중에서
첫번째 강령에 해당하는 ‘전쟁 중의 능동성’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적인 이론 중 하나인 ‘자각적 능동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마오는 “객관적 사실에 주관을 이입시키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여타 사물이 구별될 수 있는 변별점이라고 보았다. 또는
그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성립되는 사상과 그에 따른 행동은 정확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공산당의 태도는 국공내전 시기부터 형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홍군이 보여줬던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낙관적인 인식, 이와 상반되는 내전 국면에 대한 이성적인 태도는 대장정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경험을 통해 학습되어 온 것이며, 이는 일본과의 전쟁, 1946년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과 같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바꾼’ 사건의
자양분이 되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서두에 했던 자오수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당시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소설에 중국 농촌의 실상을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 역시 마오의 문예이론에 근거한 것이지만, 기존의 중국 작가들이 지식인의 고뇌와 같은 주제로 작품을
쓸 때 자오수리가 농민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농촌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후 중국이 수립되고 나서 일어난 대약진운동에 대해서 자오수리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는데, 이런
행동의 배경 또한 그의 농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약진 시기 농민의 참상을
걱정했던 자오수리는 결국 문화대혁명 때 ‘문예 반동노선’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자오수리처럼 공산당의 문예 이론을 철저하게 따른 이들조차 쉽게 수용할 수 없었던 대약진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 짧은 지면을 통해 사건의 근원 모두를 따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판단이 있기까지, 중국 수립 이후 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던 ‘생산 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불과 1년만에 목표치를 달성한 일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또한 중국 공산당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꾼’ 사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생산량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대약진운동의 기획 단계에 <지구전론>에서처럼
‘시대가 다르다’(107)는 말을 해줄 인물이 마오 주위에
없었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중국이 수립되기 이전 마오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면서 내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까닭은 그의 행동과 언설이 1949년 이후의 마오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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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지도층 역시 지구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공산당 역사》에
따르면, 공산당의 지구전에 대한 입장 표명에 대해 국민당 역시 “‘지구전’을 전국적 항전의 기본적인 전략 방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에 대해 “장제스의 ‘지구전’은 기본적으로 군사 측면의 지도 방침으로만 국한되어 있는, 단순한 군대와 정부의 통치 행위”로 평가 절하하고, 이들이 항일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과학적인 분석이 부족했다”고 언급하였다.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홍순도 외 역, 《중국공산당역사 1(下)》, 서교출판사, 2016)
[3] 모택동이
1939년에 쓴 글인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도 이와 같은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중국사회 역시
아직까지 완전한 봉건사회인가? 그것은 아니다. 중국은 이미
변화되었다. ……(중략)…… 중국 봉건 사회 내부에 있어서
상품경제의 발전은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를 배태하고 있었으므로, 가령 외국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다 하여도
중국은 역시 완만하게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다만 외국자본주의의 침입은 이러한 발전을 촉진시켰다. 외국자본주의는 중국의 사회경제에 대하여 커다란 분해 작용을 일으켰다.” (모택동, 김승일 역, 《모택동선집 2》, 범우사, 2002.)
[4] 특히 대장정
단계에서 열세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면모가 나타난다. “서북방을 향한 홍군의 행군은, ……(중략)…… 강요당한 전략적 후퇴였지만, 그러나 홍군의 사기와 정치적 의지는 예전과 다름없이 굳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군을 항일전선으로 진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에드거 스노, 홍수원 외 역,
《중국의 붉은 별》, 두레, 2017,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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