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읽는 중국사 2》_아Q정전, 뤄퉈샹쯔 210907
언젠가 세상은 소설이 될 것이다 에레혼 소설의
혁명, 소설로 이뤄낸 혁명 20세기는 소설의 시대였다. 거칠게 말하면, 지난 100여년은 소설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믿은 사람들과 소설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 사이 알력 다툼의 연속이었다. 전자는 소설이 현실을 모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깊이를 더해준다고 믿었다. 후자는
소설 따위가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소설은 결국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 가치를 폄하했다. 이야기의
범위를 줄여 중국에 대해 살펴보자. 1900년대에 접어들며 중국에는 혁명과 전복을 원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했다. 혁명가들의 주장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중국의
전통적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일한 시각을 견지했다. “첨단 기술을 수입해야 한다(양무운동)”, “제도를 바꿔야 한다(변법자강운동)”,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신해혁명과 그 이후)”……
각각의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이 청나라의 말기에 풍운아처럼 등장했다. 결국에는 봉건 왕조를 전복하자는
주장을 한 쑨원과 그의 동지들이 일으킨 신해혁명(1911년)이
중국 근대 정치사의 시작점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신해혁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들도 다수 존재했다. 혁명의 결과는 근본적 개혁과 거리가 멀었다. 황제는 위안스카이로
대체되었을 따름이었고, 중국 민중 대다수는 ‘무언가가 바뀌긴 바뀌나보다’ 하는 정도의 인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혁명과 전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회의 아래에서부터 의식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천두슈, 호적, 루쉰 등은
계몽적 시각을 담은 간행물을 만들고, 학자들의 고리타분한 말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소설이라는 장르가 중국 문학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루쉰과 같은 사람들의 발상에 주목해보자. 루쉰은 ‘환등기 사건’을 통해 의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소설로 읽는
중국사 2》에서는 “(중국인들의)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당시에는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는 루쉰의 글을
인용하여, 그의 전향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루쉰과
비슷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은, 앞문장에서 언급한 ‘문예’의 자리에 소설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 서구에서
소설을 읽은 많은 이들이 깨우침을 얻었다는 풍문에 영향을 받았기에. (“유럽이나 미국, 일본이 개화하는 시기에 왕왕 소설의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1]) 둘째, 중국 역사를 지배해 온 기존의 텍스트는 이미 생명력을 다 한 장르였기에. (“글자를 겨우 읽을 줄 아는 사람 가운데 경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은
없다.”[2]) 중국 지식인들의
소설에 대한 ‘숭배 현상’이 서구처럼 되고 싶은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든, 문학 역시 진화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한 것이든, 이들의 소설 염불 외기는 큰 효과를 거뒀다. 최근 100년간 중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문학 작품들을 나열하면, 거의 8할, 9할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소설에 해당한다. 이번 세미나에서 《소설로 읽는 중국사 2》는
근현대사 파트를 다루고 있지만, 중국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소설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중국을 ‘시의 왕국’이라 부르는 것은 적어도 최초의 현대소설 《광인일기》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에서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로 근대사를 다룬다면
‘근현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2편의 서두에 아편전쟁이 언급되어야 하겠으나, 이 책은 ‘소설로 읽는’ 중국사이기에, 소설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두 작품으로 책의 서두를 연다. 맨 처음에는 중국의 첫번째 현대 소설 작가라는 칭호를 얻은 루쉰의 《아Q정전》이 소개되며, 그 다음으로는 흔히 현실주의 문학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작품 《뤄퉈샹쯔》가 등장한다. 두 작품은 얼핏 보기에 공통점이 많은 작품이다. 모두 하층민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암울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아Q는 혁명군에 가담하였다가 총살을 당하고, 샹쯔 역시 혁명 조직에 들어가지만 끝내 하층 인생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아Q와
샹쯔가 현실감 있는 캐릭터라는 점 역시 비슷하다. 《아Q정전》이
신문에 연재되는 동안, 신문사에는 자신에 대해 비꼬는 이야기를 그만 연재하라는 항의 서신이 빗발쳤다고
한다. 《뤄퉈샹쯔》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담았다는 이유로 인민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2장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해 라오서의 소설은
문화대혁명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문학적 완성도나 각 작가가 지향하는 바는 차이가 있겠지만, 《아Q정전》과 《뤄퉈샹쯔》는 모두 현실주의의 토대 위에 등장한 작품이다. 이러한 문학적
특성은 서구 근/현대 소설의 출발점과 연관된다. ‘소설은 인생을
반영한다’는 말이 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처럼 되어버린 19세기 이후,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은 줄곧 높은 경지에 오른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중국 소설의
리얼리즘 일변도 현상’을 중국 전통의 맥락에서 분석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소설은 줄곧 멸시의
대상이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다루고, ‘귀신의 도리’
운운하는 이야기를 공자님의 후예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을 터. 소설을 진지하게 대우하는 이들은 명나라
말엽부터 등장했다. 명나라 중기부터 소설은 이미 민간 사회에서 주류 문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소설 열풍이 비로소 명말明末 문인들에게 소설을 연구 대상으로 삼게 만든 것이다. 명나라가 저물어가는 시기쯤 되면 이들은, 허구적인 이야기라 하여도
진리를 담아낼 수 있다면, 혹은 생동감 있는 묘사가 가능하다면 글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다. 괴짜 같은 주장을 하는 이도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사실을 충실하게 다루는 글쓰기 방식인 역사 서술보다 소설이 훨씬 나은 글이라며. 명나라 때는
소설이 여전히 비주류의 자리에 놓여있었다면, 루쉰과 라오서의 시대에 소설의 지위는 완전히 달라졌다. 소설,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룬다는 인식은 (직관적인 차원에서 사람들 머리 속에 남아있을지 몰라도) 사라져갔다. 루쉰은 계몽주의적
동기에 입각하여 소설가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문학 작품은 동시대 혁명가의 논설문보다 훨씬 간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설파했다. 루쉰이 차용한 현실주의가 현실을 지나치게 편집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라오서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어떠한가. 이럴거면
소설을 쓰지 말고 베이징 사람들에 대한 관찰기를 쓰지, 하는 감상이 나올 정도로 《뤄퉈샹쯔》는 실제
하층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이 작가 라오서의 발목을 잡을 정도로, 현실주의 서사가 가지는 파급력은 강력했다. 소설에서도
지리멸렬한 현실을 마주쳐야 하는가 지금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소설은 현실주의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에 대한 집착은
결국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현실의 삽화가 소설에서도 연장되는 인상을 줄 뿐이다. 여전히 소설은 응당 현실을 다뤄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배적인 주장이면서도, 동시에
순문학적 태도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SF, 좀비, 오컬트와
같은 비현실/초현실 장르들이 오히려 현실을 잘 반영한다는 역설적인 평가는, ‘창작물에서는 지긋지긋한 현실 이야기 좀 그만 봤으면’ 하는 대중의 피로도가 누적된 결과이다. 중국의 상황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도 현실주의의 거장들은 중국 소설 문단의 영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장르 문학에서 최근 각광받는 국가를 뽑으라면 중국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소설로 읽는 중국사 2》에서 중국 소설이 현실주의의 굴레를 탈피하는 과정을 일일이
살펴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예측 또한 덧붙여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왜 현재 중국 소설은 현실주의에서 가장 먼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하는 질문에 대해 희미한 답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루쉰의 글을
하나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혁명시대의 문학>이라는
강연록에서 루쉰은 곤궁하고 바쁜 시기에는 문학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은 곤궁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곤궁할 때는 문학작품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베이징에 있을
때였습니다. 궁해지자 마자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느라 글 한 줄 쓰지 못했습니다. 봉급이 나오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앉아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결코 문학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반드시 짐을 내려 놓아야만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수레를 끄는 사람도 수레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대혁명 시대는 너무 바쁘고 동시에 너무 곤궁하며, 이쪽 사람들과
저쪽 사람들이 싸우기 때문에 먼저 현대 사회의 상태를 바꾸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글을 쓸 시간도 마음도 없습니다. _ 루쉰의 1927년 황푸군관학교 강연 <혁명시대의 문학> 중에서 루쉰은 작가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에
중독된 사람에게 작품으로 도피한다고 비난조의 말을 하지만, 어쨌든 책 속으로 도망치려면 활자를 볼 시간적∙심리적 여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루쉰이 말한 곤궁하고 궁핍한 상황은 혁명이 수행되는 시점을 가리킨다. 지금
시대가 혁명의 시대라서 현실주의로 점철된 소설이 외면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촉각을
다투며 살아가야 하는 현시점에, 일상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순을 관찰하는 소설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 聞歐・美・東瀛其開化之時, 往往得小說之助._엄복嚴復과
하증우夏曾佑의 <本館附印說部緣起(1897년)> [2] 僅識字之人, 有不讀經, 無有不讀小說者._강유위康有爲의 <日本書目誌・識語(189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