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이제 누가 광인이지?2024-10-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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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가 광인이지?

《거대한 낯섦》 1주차 / 1. 광기의 언어작용 / 에레혼

2024 10 15

광인은 크게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크더라도, 말의 내용은 소위 ‘정상인’들에게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될 뿐이다. 이성지상주의라는 미명 아래, 광인의 목소리는 ‘우리편에서’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거나 종국에는 사라져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거대한 낯섦》의 첫번째 강연록 〈광기의 언어작용〉 서두에서 푸코는 용인 가능한 광기를 다룬 작품으로 《리어 왕》을, 소멸되어야 할 광기를 다룬 작품으로 《돈키호테》를 언급한다. 《리어 왕》은 광기의 비극성을 다룬 드문 작품이지만, 이러한 광기는 고전주의 연극의 작가 통제 아래에서만 활개를 펼칠 수 있다. 미친 사람의 우화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돈키호테》조차 스토리를 단순화하면 그 결말은 ‘광기를 자각한 우에 미쳤던 자신을 죽이는’ 참극에 불과하다.

“… 고전주의 시대 전체에 걸쳐, 광인들은 기껏해야 회의적인 초초감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야 마는 멋진 사회적 풍경, 사회적 풍광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 광기란 의식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광기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을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광인이 된다고 해도, 나는 내가 미쳤는지 아닌지에 대한 어떤 기준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_59

이로써 미쳤다는 진단은 광인 자신이 내리는 게 아니란 사실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오랜 역사동안 비()광인에게 광인은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눈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대상이었다. 푸코는 이를 뒷받침할 근거로 17세기 중반 프랑스에 존재했던 수용 시설 ‘로피탈 제네랄’의 예시를 소환한다. 이곳에 갇힌 이들은 정신병 스펙트럼 장애에 분류될 수 있는 환자뿐 아니라 성매매 종사자, 부랑자, 절도범, 부도덕한 자 등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기 싫은 인물이었다. 이 즈음 시기까지 광기는 흑백논리로 쉽사리 판가름할 수 있는 개념이었을지 모른다.

이성의 편을 호소하는 이들이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는 데에는 백 년 조금 넘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푸코는 ‘사드 센세이션’이 동시대 지성인들에게 난관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광기에 대한 규정이 더 이상 손바닥 뒤집듯 이뤄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논한다.

“루아예-콜라르는 푸셰에게 사드는 광인이 아니기 때문에 광인 수용소에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편지를 씀니다. 또는 차라리, 사드는 광인이지만 광기가 아닌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왜냐하면 이 광기는 이성적이고 명료하며, 모든 이성에게 반박하는 명료함을 가지며, 결국 광기에 도달한다고 씁니다._66

비광인이 제 눈에 혐오스러운 존재를 치워버리려 하는 까닭은 여러가지이겠지만 주된 이유는 아마 ‘그들의 미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일 터. 그런데 이성의 언어로 반이성을 이야기하는 사드와 같은 작가의 등장은 샌님들의 고뇌를 더욱 깊어지도록 만들었다. 강연록에서 뒤이어 등장하는 작가 앙토냉 아르토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자 하는 지성인(, 광인의 시를 출판하는 것을 거부한 잡지 편집인 자크 리비에르)에게 자기 작품과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한다. 비광인들은 더 이상 광인의 언어에 ‘체계성이 없다’느니 ‘해설이 불가능하다’느니 첨언 따위 할 수 없는 상황에 한 셈이다.

광인은 줄곧 침묵하도록 강요받은 이들이며, 애초부터 아르토처럼 스스로의 발화 체계를 설명할 수도 있었을 테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고, 광인의 말을 해석하려는 노력조차 한 이들이 없었을 따름이다. 푸코는 〈광인들의 침묵〉에서 그들의 침묵은 사실 고요한고도 꾸준한 눌변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광기 안의 언어작용〉에서는 당대 문학의 전복된 지형도에 대해 언급한다.

“이 광기의 언어 작용은 왜 오늘날 갑자기 중요성을 갖게 되었는가? , 우리 문화에서, 지금, 이 말들, 아마도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가질 정신 나간, 일관성 없는 이 말들에 이렇게도 생생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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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동시대의 문인들이 쓰는 언어는 몇 세기 전이라면 미친 사람의 말이라며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단어를 나열하며 무의미한 말놀이를 반복하는 시를 짓고, 기승전결 따위 갖춰지지 않은 소설을 짓는 일이 힙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격세지감의 문학사 아닌가.

이 힙스터들이 ‘헛소리 문학’에 심취한다 한들, 언어 규칙이나 체계에서 이탈하기 위한 무작정 질주를 감행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된 계약의 신화(94)를 추구하는 작가들은 기존의 언어 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지만 내재적인 규칙을 재구축한다는 특성을 보인다. 친구를 ‘인형’이라 부르고, 몇 주를 ‘조약돌’이라 지칭하는 문학적 실험은 작품 내의 규칙을 발견하면 해독이 가능한 수준이다. 이들보다 더 먼 곳으로 도약하는 작가들을 푸코는 ‘그 말의 내부에 남아 있게 될 한 언어 작용의 신화(98)를 추구하는 이들로 규정한다. 이들의 작품 세계는 실제 사회의 언어 규범과 단절된 채로 내제적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해당 작가들의 문학적 행보는 언어 자체의 내적인 힘을 탐구하는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미셸 푸코가 진단한 20세기 문학의 양상, 헛소리 문학의 유행이 비단 100여년 전의 문제만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단순히 비약적 독해일까. 바로미터의 어느 쪽 눈금을 가리키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지금 유행하는 문학의 언어나 (하다못해) SNS 말투는 모두 약간씩의 광기를 품고 있지 않나. 푸코는 100년쯤 전의 강연에서는 ‘오늘날의 문학이 광기에 매혹되었다거나 또는 홀려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100) 라며 예상되는 논란을 피해갔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이러한 사족을 붙일 필요도 없어 보인다. 작가의 광증을 잘 풀어서 서사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성공신화를 담은 책보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된다. 이런 당사자성에 대한 흠모 풍조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도둑맞은 광기’라는 말이 나올지도? 비광인들이 광인의 처지마저 앗아가려는 격변이 연출된다면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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