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자본 9 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 임금은 노동 이후에 지급될 때가 많다. 그렇기에 임금을 노동의 보수라고 여기기 쉽다. 과연 그럴까? 마르크스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아무 문제 없이 공정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듯 보이는 곳에서 은폐된 지점을 포착한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개인적인 폭력과 착취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자본가의 폭력이나 사기에서 찾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착취를 통해 생산된다. 임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노동자는 생산과정에 자기 노동력을 투입하면서 자본가와 이윤을 나누어 갖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과정에 투입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생산의 결과물인 가치생산물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공동소유물이 아니라 자본가의 소유물이다.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가 아닌 노동력을 판매한 비용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분배가 아닌 생산의 문제로 보았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상품은 노동이 아닌 노동할 수 있는 능력, 곧 노동력이다. 만일 노동력과 별개로 ‘노동’이라는 상품이 존재할 수 있다면 노동자는 이 상품만 떼어 팔면 되지 굳이 노동하러 갈 필요가 없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므로, 노동에 가치나 가격을 매긴다는 일 자체도 말이 안 된다. 만일 ‘노동’의 가치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노동이 생산한 가치생산물의 합계가 같기에 잉여가치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동일하게 본다면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가치를 모두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기에 자본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쉬운 이론의 허점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좀처럼 파고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하는 지점에서 어리석음 대신 파렴치함을 본다. 임금을 ‘노동의 가격’으로 간주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대등하고 공정한 교환관계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에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이 들어있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잉여가치는 잉여노동시간을 통해 실현된다. 임금이 ‘노동의 가격’이라고 말하면, 모든 노동의 대가가 지불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눈속임을 통해 노동에는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이 혼재하며,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구분되는 부분이 그 안에 섞여 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나아가 잉여가치가 잉여노동과 불불노동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사실도 보지 못하게 하며, ‘잉여가치’라는 개념과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력’ 개념의 구분을 여러 번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된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지지하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견해를 엄밀한 이론적 견해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이론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그 이론의 영역 너머에서는 계급 간의 힘이 충돌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론가들이 존재하듯 프롤레타리아에게도 계급의 이익을 결집할 이론적 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마르크스가, 그의 특별한 눈과 이론이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혁명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시대로부터 시간이 너무 흘렀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지식처럼 마르크스의 지식도 특수한 지식이지 보편적 지식이 아니다. 특히 이 책의 부록에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재생산노동’의 생산성을 부정한 스미스의 견해를 마르크스가 옹호한다면 현실의 우리가 마르크스에게 느끼는 거리감은 더 커질 것이다. 어쩌면 마르크스 역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남성 가장 입장에 몰입했을 수 있다.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에 잠시 눈감아야 노동자 계급 전체에 현실적인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 안에서 ‘생산성’ 개념을 다시 논의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 계급의 이익에 마르크스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