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낯섦》 Ⅱ. 문학과 언어작용 1964년 12월. 벨기에 브뤼셀 푸코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발표를 시작하지만, 이 질문은 분명한 해답을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은 문학에 관하여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부수거나, 완전히 낯선 곳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파괴적인 과정을 통해 문학은 더 이상 기록이나 감정에 충실한 언어작용의 도구가 아니게 되며, 언어작용을 넘어선 글쓰기(에크리튀르)라는 행위가 된다. ‘문학’이라는 공간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이가 종국에 마주하게 되는 곳은 텅 빈 공백뿐이다. 그 공백은 아무도 밟지 않은 순수한 공간, 누구도 태어나거나 다녀가지 않은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폐허나 무덤에 가깝다. 이 무덤의 형상이 푸코가 근대의 문학이라고 말하는 형상에 가깝다. 더구나 이 무덤은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계속해서 확장되고 새로운 죽음이 들어차는 무덤이다. 근대 문학의 임무는 문학을 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19세기의 문학이 문학을 완성하면서 살해했다고 말한다. 작품은 자신이 속한 문학 자체에 대한 거부를 경유한다. 부정과 거부, 살해 시도가 새로운 문학적 행위가 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초현실주의자에게서 푸코는 그런 시도를 발견한다. 백지 위에 쓰인 모든 단어는 문학을 향한 깜빡임이 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단어는 일상적인 언어작용과는 멀어진다. 이제 단어는 평범한 단어를 벗어나 기호가 된다. 푸코는 기호와 타락을 문학의 새로운 두 형상으로 제시하는데, 하나는 ‘위반의 파롤’이며 다른 하나는 ‘도서관의 되풀이’라 부른다. 사드와 샤토브리앙이 각각 그 예에 해당한다. 사드가 18세기 말 위반의 파롤을 보여준다면, 샤토브리앙은 도서관의 영원성 안에서 문학의 견고한 존재와 결합하려 한다. 사드가 위반이라면 샤토브리앙은 죽음이다. 푸코에게 문학은 도서관의 되풀이, 단어 살해의 불순함으로부터 도래한다. 서구의 근대 문학이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이유를 푸코는 수사학의 사라짐에서 찾는다. 문학은 수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사학이 지녔던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에, 숨기는 동시에 드러내며 언어작용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동시에 소거한다. 문학은 책(인쇄물)과 결합하게 되면서 본질과는 더 멀어지며 시뮬라크르로 남게 된다. 위반하는 언어작용인 문학은 책에 갇힌 상태가 되어서도 책에 대항한다. 이 발표의 첫 번째 세션이 ‘문학’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세션은 ‘비평(비판)’에 관한 이야기다. ‘비평(비판)’이라는 용어는 더 노골적으로 철학적 작업과 연결된다. 푸코는 글쓰기에서 비평 행위가 증식하면서 ‘비판적 인간’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비평적 행위는 증가하는 동시에 분산되었기에 이제 비평 대상인 텍스트 내부를 넘어 철학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푸코는 비평(비판)의 영역 자체를 다르게 설정한다. 잘 무장한 독해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글쓰기 행위가 되어가는 당대의 비평에서 푸코는 칸트의 작업에서 나타났던 ‘비판’의 가능성을 엿본다. 푸코는 야콥슨이 제기한 ‘메타언어 작용’이라는 개념을 불신하며, 다시 파롤에 주목한다. 파롤은 랑그 안에 거주하지만, 언제든 위반을 통해 코드에 복종하지 않을 가능성을 내비친다. 그 불복종의 위험이 곧 문학이 된다. 코드와의 단절이 아니라 불복종의 가능성 자체가 위험이다. 푸코에게 언어작용은 절대적으로 되풀이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다. 이 끊임없는 기호들의 순환 안에 문학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문학과 언어작용을 시간과 관련해 사유하려 할 때가 많지만, 푸코는 베르그손과 달리 언어작용의 공간성을 강조한다. 언어작용 자체가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작품의 내부에도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은 분명 충만하고 고요한 공간과는 거리가 멀 테다. 텅 비었지만, 태풍과 광채, 섬광이 소용돌이치는 공간을 그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