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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발제 (0117)2019-01-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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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푸코의 물음은, 칸트가 시도한 철학적 작업과 논쟁적이고 소소한 활동인 비판적 태도 사이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철학 자체에서 시작되는 물음이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의 경계에서, 철학에 맞서거나 철학을 희생시키면서, 철학의 가능성을 바라고 미래의 철학을 지향하면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연장되는 물음으로 보아야 한다. 근대 서구에서 비판적 태도는 15~16세기에 시작된 어떤 사유방식, 말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더불어 존재하는 것과의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 우리가 행하는 것과의 관계, 사회 및 문화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이기도 하다.

 

비판은 다른 것과 맺는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비판은 미지의 도달 불가능한 어떤 미래 혹은 어떤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다. 자신이 법을 제정할 수 없는 영역을 향한 시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유로 비판은 철학, 과학, 정치, 도덕, 법 권리, 문학 등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동시에 비판은 늘 스스로가 표방하는 유용한 가치와 절대적 필요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비판은 일종의 덕이다. 푸코는 이 강연에서 일반적인 덕으로서 비판적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푸코는 비판적 태도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 중 한 가지를 제안한다. 고대 문화와 완전히 이질적인 관념을 발전시킨 기독교 사목에 대한 분석이다. 기독교 사목 내에서 개인은 반드시 통치 받아야 하는 상황에 내맡겨져, 구원과 복종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진실과 맺는 삼중적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기독교 교회에서 오랫동안 ‘기술 중의 기술’이라 불렸던 것은 양심의 인도였고 인간들을 통치하는 기술이었다. 수도원 내부 제한된 집단들에서 실천되었던 이 통치기술들은, 15세기 종교개혁 전부터 두 가지 의미로 폭증했다. ① 세속화, 종교를 넘어 시민사회의 다양한 주제 속으로. ② 세분화, 각 집단과 영역마다 다르게. 푸코는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15세기 혹은 16세기에 제기된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 따라 교육, 정치, 경제 등의 기술이 통치기술로서 급증했다고 분석한다.

 

푸코가 보는 통치화의 문제는 ‘어떻게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따로 있지 않다. 이는 전혀 통치 받지 않겠다는 식의 대립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푸코는 ‘비판적 태도’를 일종의 문화적 형식, 도덕적·정치적 태도,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통치기술의 관점에서 ‘비판적 태도’는 ‘이런 식으로, 또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 받지는 않으려는 기술’이 된다. 푸코는 비판을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이라고 일차적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가 모호하게 느껴질 이들을 위해 명확한 몇몇 적용지점들을 덧붙인다.

① 신의 가르침의 작용방식에 결부된 관계와 다른 관계를 성서 속에서 모색하는 일

② 법의 비정당성에 대립하며 사법적으로 통치권의 한계를 묻는 일

③ 권위에 맞선 확신의 문제

 

결국 비판의 적용지점은 성서, 자연, 자기와의 관계, 법률, 독단적 권위이다. 나아가 권력, 주체, 진실을 서로 연결시키거나, 하나를 다른 두 가지와 연결시키는 관계망이 본질적으로 비판의 진원지이다. 여기서 푸코는 통치화와 비판을 간략하고 정의하고 넘어간다. ‘통치화’가 ‘사회적 실천의 현실 속에서 진실을 주장하는 권력메커니즘을 통해 개인을 예속화하는 문제와 관련된 활동’이라면, ‘비판’은 ‘진실에 대해서는 그 진실이 유발하는 권력효과를, 권력에 대해서는 그 권력이 생산하는 진실담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주체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활동’이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이고, 숙고된 불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의 본질적 기능은 진실을 둘러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 속에서의 탈예속화이다.

 

비판에 대한 푸코의 이런 관점은 칸트가 말한 ‘비판’보다 ‘계몽’에서 발견된다. 푸코가 이 강의에서 언급하기 이전까지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1784년의 텍스트에서 칸트는 계몽을 어떤 미성숙 상태와 연관시켜 정의했다.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의 과오로 인한 미성숙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된다. 미성숙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이 미성숙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여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 있다면, 이 미성숙 상태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려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다” 푸코는 여기서 미성숙의 상태, ‘인도하다’라는 용어, 권위와 과잉과 무능력이 맺는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계몽에 대해 기술하는 와중에 용기에 대한 호소가 있다는 사실 역시.

 

칸트가 계몽이라고 기술한 것을, 푸코는 비판이라고 기술하려 한다. 푸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회의 통치화라는 거대한 역사적 절차로부터 출발해 서양 특유의 태도로 나타났다. 계몽주의의 표어 ‘감히 알고자 하라’는 고대 로마의 시에서 인용되었다. 푸코는 칸트의 입장에서 계몽과 관련한 비판의 문제를 다시 정리하려고 한다. 이때 비판은, 우리의 인식과 그 인식의 한계들에 대해 갖는 관념 속에서 자유의 문제가 나타남을 알려준다. 타인이 ‘복종하라’고 명령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인식을 스스로 올바른 관념으로 만들게 될 때, 그 순간 자율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복종하라’는 명령에 더 이상 순종할 필요가 없게 된다. 칸트가 말하는 ‘알고자 하는 용기’는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 있고, 자율성은 주권자에 대한 복종과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과 진실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탈예속화의 기획 속에서 칸트가 비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계몽에 대한 전제 개념으로 인식에 대한 인식을 부과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칸트는 비판적 기획과 계몽 사이에 거리를 두었지만, 푸코는 그 차이보다는 칸트가 제시한 비판적 기획이 역사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주목하려 한다. 푸코는. 칸트가 말한 비판이 계몽보다 주목받아온 역사적 힘에서 세 가지 근원적 특징을 발견한다. ① 실증과학의 성립, ② 국가 또는 국가 체계의 발전, ③ 국가에 대한 학문 또는 국가주의의 파생. 과학이 생산력 발전에 기여하면서, 국가주의적 유형의 권력이 여러 기술의 총체를 통해 점점 정교화 된다. 계몽과 비판 사이에 관한 칸트의 문제제기는 불신과 회의의 경향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성 그 자체가 권력의 남용과 통치화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이 질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대학과 학문이 오래전부터 행정 및 국가 구조에 속해있었던 독일에서는 이 질문이 좌파 집단에서 제기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이런 질문이 우파 쪽에서 발견된다. 종교개혁을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로서 최초의 비판운동이라 보는 푸코는, 종교개혁이 독일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프랑스에서 계몽 역시 독일만큼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이 철학사 안의 사소한 에피소드로 평가절하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프랑스 안에서 계몽의 문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저작들과 가까워지면서 다시 제기된다. 계몽은 의미에 대한 문제제기와 무엇이 의미를 구축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되돌아온다. 기표장치가 의미를 구축하고 효과로서 강제한다는 분석을 통해, 이성과 권력 간의 문제가 재발견된다. 그렇다면 전도된 계몽의 문제와 관련하여, 합리화는 어떻게 권력의 폭발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합리성에 대한 모색과 과학적 사회주의, 그리고 혁명을 통해 과도한 권력(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과 마주하게 된 푸코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16세기 이래로 서양의 사상과 과학, 사회적 관계, 국가 조직, 경제적 실천 그리고 개인의 행동까지도 특징지었던 합리화는 무엇인가? 푸코는 계몽을 근대철학의 핵심문제로 지적하는 일이 몇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① 이것은 역사철학이나 철학사와는 무관한 역사-철학적 실천에 연루되어 착수함을 의미한다. 이 작업은 철학을 경험성의 영역으로 되돌린다. 또 진실이 역사적 내용에 미치는 권력효과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역사적 내용을 진실로부터 해방시킨다.

② 이 역사-철학적 실천은 경험적으로 한정 가능한 일정 시대와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의 형성, 부르주아 세계의 성립, 국가 체제의 정립, 근대 과학 및 그에 관련된 기술들의 정초, 통치 기술과 대항 통치 기술 사이의 조직적 대립 등을 통해 정의될 수 있는 시대이다.

 

계몽의 문제는 인식의 운명에 결부될 권력 효과를 드러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추적함으로서, 인식을 모든 가능한 인식의 구성조건과 정당성의 조건에 결부시킴으로서, 역사 속에서 정당성 밖으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추적함으로서 제기된다. 인식과 지배의 관계를 인식의 남용으로 이해하는 관점들이 나타난다. 푸코는 이런 정당성의 탐구와는 다른 절차, 인식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를 택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정당성보다는 사건화의 검토가 이루어진다. 푸코가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부당한지의 문제가 아니다. 강제 메커니즘과 인식 요소 간의 유대관계, 양자 간의 상호 참조와 지지 작용의 전개, 인식의 요소가 생산하는 권력효과들, 각 요소에 고유한 형식과 정당화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는 여기서 ‘일정한 시기, 특정 영역에서 수용가능한 모든 절차와 인식 효과를 지시하는 용어’를 ‘지식’이라고 정의한다. ‘권력’은 ‘행동이나 담론을 유발할 수 있는 일련의 특수하고 정의 가능하며 이미 정의된 메커니즘을 포괄하는 것’이다. 인식이나 지배가 아닌 지식과 권력이라는 용어를 통해 푸코는, 보편적 원리의 발견보다 분석의 단면과 요소의 유형을 설정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정당화의 관점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지식과 권력이 유일하거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 분석의 격자로서 권력과 지식은 서로 다른 두 범주가 아니다. 지식과 권력의 구분, 억압과 기만의 방식을 밝히는 일보다 수용 가능성의 요인들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지식-권력 결합체’를 기술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체계의 수용가능성의 인위성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어떤 것의 안정성, 정착, 토대가 무엇으로 인해 소멸할지 포착하게 만드는 사건화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태도의 문제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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