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송선생님 가라사대 (수호전 32회~38회)2021-04-2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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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리터러시 210420 - 수호전32~38]

송선생님 가라사대

에레혼


 

급시우라는 단어가 꿈에도 나올 지경이다. 송강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중국이 이렇게 좁은 사회였나. 고작 말단관리인 사람이 송나라의 셀럽이라니. 중국 문학에서 송강과 비견되는 인물로는 삼국지의 유비를 꼽을 수 있다. 그래도 유비는 돗자리 장수 시절부터 독자와 함께 했으니, 독자들이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다. 유비의 얼굴이 두껍다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가 눈물 연기의 달인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지만촉나라가 천하통일에 실패하는 삼국지엔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면, (반대로 이 안타까운 분위기 조성에 거부감이 든다고 하더라도) 이는 삼국지가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라는 방증이다.

 

반면 수호지속 송강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송강과 관련된 가장 핵심적 에피소드는 염파석을 죽인 일이다. 30회 언저리에 들어서면서 중재자 포지션을 부여받았지만 머리 속에는 염파석과 대치하던 송강전의 찌질한 모습이 되새김질 될 뿐. 송강에 대해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은 따로 있다. 김성탄이 수호전독법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지은 글을 다시 읽어보면 거슬리는 문장이 하나 발견된다.

 

수호전은 귀신이나 괴이한 일을 서술하지 않았으니 작자의 창작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났음을 볼 수 있다. 서유기는 일을 해결하지 못할 때마다 남해관음이 나타나서 구해줬다. (수호전 1, 57.)

 

중국 문학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우리 중국에도 고대부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수호전남해관음은 바로 송강이 아닐지. 송강은 그 명성 하나로 몇 번이나 위기 상황으로부터 탈출한다.

 

너는 이분이 누군지 아느냐?” / “모릅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우리 마을에서 창봉을 쓰며 약을 파는 자에게 은자를 주어 우리 진의 위풍을 무너뜨렸기에 잡으려고 쫓아왔습니다.”

저분이 내가 항상 너희에게 말하던 산동 급시우 운성형 송 압사 공명 형님이다. 너희 둘은 빨리 형님께 절하지 않고 뭣하느냐!”

두 형제가 박도를 내던지고 몸을 구부려 절하며 말했다. / “진작부터 형님 이름은 듣고 있었습니다. (수호전 4, 36, 82.)

 

[송강이 위기에 처한다 송강의 신원을 보증해 줄 수 있는 동료가 나타난다 그 동료가 송강을 해치려는 사람을 나무라며 송강의 정체를 밝힌다 송강이 위기를 모면한다] 32회부터 38회까지는 이런 이야기 구조가 반복된다. 예전의 소설고전 소설에서 만파식적스러운 소재가 등장할 수도 있지. 하지만 송강과 관련된 에피소드에서 다소 맥이 빠지는 이유는, 수호전이 원래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 나가는작품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송강이 창을 잘 쓴다는 사실은 이미 구전으로만 떠돌고 있으며, 송강의 진정한 무기는 그의 명성이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다.

 

송강 서사에 이토록 회한이 남는 이유는, 작가의 의도적 설정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 수호전의 작가는 송강 이야기에 이어서 무송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송전이 마무리되어가는 단계에서 다시 송강이 등장하며 주인공들이 점차 한곳으로 운집할 조짐이 등장한다. 그럼 이제 여기서 작가는 한 번 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직 108명의 도적 가운데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은 쌓여있고, 이들에게 개별적 서사를 모두 부여하기도 불가능했으리라. (이 작품이 원래 희극 공연을 목적으로, 그리고 구연을 목적으로 쓰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도적들이 양산박에 모이면, 이들의 내분을 묘사하지 않는 이상 대항해야 할 세력은 관군 하나가 남는다.

 

느슨해져가는 스토리를 다시금 긴장감을 부여하는 방법. 작가는 작품 중반 이후로 이 점을 고심했을테지. 앞선 세미나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수호전은 사실 어디서 덮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소설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자가 책을 덮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가는 익숙한 승부수를 띄운다. 바로 독자에게 더 강한 자극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그 임무를 부여 받은 사람은 무송만큼이나 임팩트가 강한 이규이다. 이규의 행동이 파격적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인물은 지금까지 송강을 대하던 사람들과 사뭇 다른 행동 패턴을 보여주기도 한다.

 

혹시 지금 이 사람이 산동 급시우 검둥이 송강이라는 거야?”

어허, 이놈이 그래도 감히 어른을 전혀 몰라보고 윗사람 이름을 직접 불러대느냐! 빨리 절 안하고 뭐하는 짓이냐!” / “진짜 송 공명이면 내가 절을 하겠지만, 만일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절은 무슨 젠장맞을 절이야! 절급형, 나를 속여 절 시켜놓고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수호전 4, 37, 95.)

 

이규는 다른 인물들이 펼친 폭력성을 짧을 시간 안에 늘어놓는다. 그의 무기 끝에는 감정조차 담겨있지 않다. 작가는 다른 캐릭터들의 열전에서 그들이 양산박에 들어가기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이규는 완성형 악당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심지어 김성탄은 맹자의 한 구절까지 들먹이며 이규를 가장 최상위 등급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규가 송강의 이름만 듣고 바로 태도를 바꾸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는 김성탄이 언급한 의 적절한 활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처럼 보였다. (repeat과 피avoid의 개념으로 고대 소설 비평을 논한 사례는 조관희(2016)의 논문 중국 고대소설에서 중복'의 서사론에서 참조하였다.)

 

피하려면, 먼저 그것을 범해야 한다. 범해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곳에 다다르면, 거기서 내 문장을 읽는 세상 독자들이 나의 재능이 담긴 글솜씨를 보게 될 것이다. (김성탄의 평점으로 수호전 11회 서두에 등장한다.)

將欲避之, 必先犯之. 夫犯之, 而至于必不可避, 而後天下之讀吾文者, 于是乎而觀吾之才之筆矣.

 

그렇지만 이야기 구조가 절묘하다는 사실과 별개로, 이규의 등장은 다시한번 송강을 재미없는 캐릭터로 부각시킨다. 이런 인물도 작품 안에 있어야 날뛰는 인물들이 중재가 되겠지, 하고 설득을 하지만 여전히 송강의 매력을 느낄 수는 없는 회차였다. 김성탄 역시 수호전독법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이규를 묘사한 문장들이 모두 절묘한 것은 바로 단락마다 송강 다음에 묘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자는 송강의 간사함을 몹시 증오했을 것이다. 그래서 송강이 사악함을 드러내는 곳곳마다 이규의 순박함으로 대비시켰다. 송강의 사악함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생각지도 못하게 이규의 천진난만함을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을 죽이려고 창봉을 연마하다 훌륭한 무예를 가지게 된 것과 같다. (수호전 1, 60.)

 

이 서술에서 김성탄의 초점은 이규에게 향해있다. 송강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증오심(?)이 오히려 이규를 부각시킨 것이라는데,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송강은 그저 전형적인 소설 속 인물일 뿐이고, 그와 엮이는 인물들이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기에 송강의 면모가 점차 초라해져 가는 듯하다. 송강이 투항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는가에 따라 질책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송강이 이야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억울하다고 한 마디 할 법한 상황이다.

 

양산박 108명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인물에 해당하는 송강. 그는 시내암과 김성탄의 가공을 통해 필요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인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인물이 양산박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아니러니하게 느껴졌다. (김성탄의 화법을 빌리자면, 작가가 송강을 죽이려 창봉을 연마했으나 이 세계관에서 송강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러나 수호전속 개성강한 인물들 사이에서 모난 곳 없는 송강 이외에 리더 자리에 적합한 이도 없어 보인다. 캐릭터들의 기행에 집중하는 전반부에 환멸을 느낀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양산박에 모인 이후를 다루는 후반부를 기대해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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