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 <비판이란 무엇인가?> 후기2019-01-2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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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푸코의 후기 강연을 읽었고, 특유의 분위기와 에너지를 곱씹게 된다. 철학의 경계에서 철학에 맞서면서 철학의 가능성을 바라는 물음과 태도들. 푸코는 칸트가 1784년에 발표한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칸트가 ‘계몽’이라 불렀던 것을 ‘비판’이라고 부른다. 칸트의 ‘계몽’이 구 체제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푸코는 프랑스혁명 시기의 ‘계몽’을 현재적 의미로 불러낸다. 성서을 번역하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시대에 루터가 한 일이, 푸코가 보는 ‘비판’이다. 푸코가 말하는 비판은 통치의 문제이다.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푸코에게 있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따로 있지 않다.

 

푸코에게 통치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문제이다. 지식, 실천, 사회와 문화, 타자와 맺는 모든 관계들이 통치의 문제이며, 비판적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비판적 태도는 권력이 생산하는 진실담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활동이다. 사유방식이며 말하는 방식인 동시에 행동방식이다.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이고, 숙고된 불순종의 기술이다. 비판은 탈예속화를 지향한다. 푸코는 ‘아예 통치 받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푸코에게 통치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타자와도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우리에게 통치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통치 속에서 예속된 주체는 탈예속화를 모색하고, 타자를 통치하는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통치 받으려고 노력한다.

 

푸코는 칸트가 제기한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비판에도 주목한다. ‘이성 그 자체가 권력의 남용과 통치화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프랑스의 좌파는 이성에 대한 회의에 주목하지 않았다. 푸코의 분석에서 합리화는 권력을 비판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폭발을 가져왔다. 여기에 권력이 남용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푸코는 권력의 남용보다는,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려 한다. 지식과 권력의 구분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지식-권력 결합체’를 기술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실과 거짓의 구분, 정당과 부당의 문제보다 정당성을 부여하고 판결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히려 정당화의 관점과 멀어져야 한다. 지식과 권력은 유일하거나 보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억압과 기만의 방식을 밝히는 일보다 체계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모든 체계는 자연스럽게 수용되지 않았다. 어디에도 정당성이 없다고 전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당성이 아닌 수용의 인위성에 대한 추적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 예를 들면 가부장제, 자본주의, 국가 같은 것들 -의 안정성, 정착, 토대를 의심하고 무엇으로 이것들이 소멸될 수 있을지를 포착하는 사건화가 필요하다. ‘지식-권력 결합체’ 구조의 탐색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태도의 문제가 중요하다. 비판은 분명하게 태도의 문제이다.

 

푸코는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철학의 경계에서 철학의 미래를 지향하면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비판적 태도는 어떤 유형의 강력한 단절과 방향의 전환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태도이다. 어떤 것의 가능성을 바라고 미래를 지향하려면 안정성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단절하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무언가를 존속하게 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푸코가 말하는 비판적 태도가 생존의 방식이며 기술이고 전략이라고 믿는다. 스스로가 철학자가 아님을 선언하는 푸코의 이 강연은 생존에 대한 모색이 지닌 활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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