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이 이뤄낸 중국 혁명
마오 세미나 1월 30일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맨 처음 순서인 「백이열전」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백이와 숙제는 어진 사람들이지만, 공자(의 평가)를 얻고 나서 그 명성이 빛을 더했다.”[1] 이 구절은 사마천이 『사기』에 굳이
황제나 지식인과 같은 주류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열전’을
추가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그는 후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을
사람들(閭巷之人)’도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면서 이 구절이 생각난 이유는 에드거 스노가 단순히 자신의
기록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인물들 위주로 채우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책 전반에서 홍군 개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붉은 별』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이
1930년대에 일궈낸 정치적 업적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스노의 책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마오쩌둥의 일대기를 담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들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8부에서 10부에 걸친 이야기는 중국 수립에 있어 인민들이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던 것들은 조금 더 구체화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부 홍군과 함께 上]
특이한 반란군
홍군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10대에 속하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당대 지식인들의
우려는 홍군 내부에서 무색한 말이 될 정도로 이 병사들의 60~70퍼센트가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급료 대신 토지가 분배되며, 해당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의
소유권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장교 또한 홍군 일반병과 마찬가지로 황푸군관학교ㆍ동북군ㆍ유학파
등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절제’는 홍군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다. 에드거 스노가 “청교도적”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이들은 문란함과 거리가 멀고, 술ㆍ담배를 멀리하였다. 그리고 지휘관들은 전투에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앞장서는 태도를 취하는 편이고, 따라서 전투에서 홍군 장교들의 사상률은 군 지도부에서 그 희생을 걱정할만큼 심각한 편이었다. 즉, 홍군은 중국 역사 속 반란군들과 달리 방종을 일삼지 않았으며, 인민을 약탈하지 않고 자급자족으로 군대를 유지했다. 이런 홍군의
태도는 중국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펑더화이, 그리고 유격전
전무후무한 군대 ‘홍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펑더화이라는 인물로, 책에서 그는 호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사령부는 후난성에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탄생시킨 인물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조촐하다. ‘소홍귀’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을 만큼, 그는 특권 의식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펑더화이는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교적인 상하 관계에 염증을 느끼고 집을 벗어나기에
이른다. 여러 직업을 거친 그는 마을 대부호의 창고를 습격한 이후 군대로 입대하게 된다. 사마광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중국 사회에도 근본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약력에 대해 비교적 간단히 설명을
한 펑더화이는 공산당이 택하고 있는 유격전술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요약하자면 공산당은 그들의
우방군이 되어줄 농민들이 처해있는 상황, 그리고 1920ㆍ30년대 중국의 지리적 특수성을 철저하게 고려하여 유격전을 택한 것이다. 또한, 펑더화이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 중국 공산당은 유격전이 반드시 성공하는 전술이라는 독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유격대를 운용한다. 군대의 규모면에서 백군과 비교하기 어려웠던 홍군은 불가피한
이유에서 유격전술을 택한 것이나,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처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 속의 일상
중국에 가지 않은 사람은 중국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갖게 된다. ─ 이 말은 지금도, 1930년대에도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에드거 스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홍군은
총을 장식품으로 다루는 희극적인 군대와 거리가 멀다. 홍군과 구식 군대의 큰 차이점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락 시간이나 체육 활동을 하면서도 그들의 체력을 단련시키는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또한 홍군 진지에는
‘레닌 클럽’이라고 불리는 집합소가 있어서, 전술을 시연할 수 있는 조형물, 그리고 한자 교육을 위한 교재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러한 교육 체계 속에서 훈련된 홍군은
자신이 임하고 있는 전투에 대해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갖게 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정치 집회’이다. 홍군
병사들은 이 집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또한 정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노의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신들이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이방인에게 밝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임은 공산당의 이념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하지만 전쟁 상황에서 그들의 각오를 다지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중국 수립 이후에 이와 같은 선전과 교육 방식이 당 지도부에게 이용된
방식을 떠올려볼 때 이러한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당과
일본을 마주해야 하는 당시 홍군에게 이러한 방식의 교육은 효과적이었으며 불가피한 것이었다.
[9부 홍군과 함께 下]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도자
쉬하이둥은 펑더화이의 부하였지만 국민당이
동일한 현상금을 건 ‘악명 높은 비적’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등장했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며, 자신의
계급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처럼 ‘투철한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모습은 쉬하이둥이 다른 지도자들과 대비되는 특징이지만, 그
역시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을 떠나 군대에 입대하여 현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쉬하이둥과 에드거 스노의 대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국민당군이 홍군과 중국 인민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언급이다. 책 곳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해당 시기에 국민당에 의해 공산당의 악행은 괴담처럼 퍼져 있었다. 쉬하이둥의 입을 통해 그들이 입은
피해를 듣는 일은 누락된 사건을 채워 넣는 일이면서 동시에 홍군이 어떤 이유에서 투철한 계급 의식으로 무장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백군은 홍군과 달리 인민(특히 여성)에 대해 잔혹한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홍군과 홍군이 아닌 사람을 농촌에서 더 이상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죽이기도 했다. 스노는 홍군 역시 보복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나,─그는
이 부분에서 자신이 만난 홍군이 서북방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자신이 본 바에 의하면 홍군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 행위는 없었다고
단정짓는다. 앞서 살펴본 홍군 병사들의 중국 인민에 대한 믿음, 그리고
책 전반에 인민들이 홍군에게 드러내는 호감을 생각해본다면 스노의 추론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쉽게 답이 나온다.
회족(回族)과 공산당
대장정을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홍군은
일본─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러 세력ㆍ다양한 민족들과 손을 잡아야 했다. 9부에서는 중국의
회교도(회족)와 홍군이 손을 잡게 되는 과정이 잘 나타난다.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한족(漢族)에 동화되기를 거부하였으나 점차 문화적으로 한족과 유사하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종파의
분열로 인해 민족적 단결의 원동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공산당은 회족이 처한 상황을 이용하여
2천만명에 이르는 회족들을 공산당 휘하로 편입시키고자 하였고, 소련과의
지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당시 회족의 지도자 마홍쿠이는 국민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회족 사람들이 세금과 부채를 떠안게 만든 장본인이다.
공산당은 인민의 적을 단죄한다는 명목 하에 마홍쿠이를 몰아낼 수 있었으며, 회족의 문화와
자치권을 보장하는 약속을 바탕으로 ‘중국회민홍군’을 설립하게
된다.[2] 스노가
만난 회족 군인의 말을 살펴보면 많은 회교도들이 홍군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서부를 점령한 힘을 바탕으로 중원을 수복하려는 홍군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부 전쟁과 평화]
소홍귀를 만나다
홍군의 소년병들은 스노에게도, 독자들에게도 아마 큰 충격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불과 열한 살의
나이로 홍군에 입대한 아이의 천진한 대화를 통해 당시 중국 인민들이 홍군에 대해서 품고 있는 존경심과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 감히 짐작해볼 수
있다. 서북방 소비에트 지구에 4만명, 홍군에만 백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 선봉대는 공산당의 자랑으로 묘사된다. 이 소년들은 미천한 출신인 사람들이 많아서, 전장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자신들을 인격체로 존중해주는 홍군에 크게 만족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병사들이
단순히 치기 때문에 입대를 결심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표하는 바인 항일 운동이나 중국의
혁명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또한 소년병들이 성인 병사들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 소년들 역시 계급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사람을 대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어린 회의론자’들이 펑더화이를 일반 병사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며 검문하는 모습은 혁명 시기
중국 공산당의 수평적 관계와 건강한 조직 문화에 대한 방증처럼 보인다.
주더,
영웅이 된 “꺼우와즈(狗娃子)[3]”
10부 마지막에 소개된 주더는 펑더화이, 린뱌오와
함께 국공합작ㆍ내전시기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여타 홍군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호지』와 『삼국지』 속 장수들의 모습을 보며 무인의 꿈을 키웠다. 그는
위안스카이에 반기를 들었던 차이어 장군 휘하 병사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게 된 주더의
시작은 아편을 즐기고 처첩을 여럿 두는 등 ‘혁명 영웅’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있는 해외 유학파들의 영향을 받아 신해혁명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으며, 윈난성의 재무위원을 지내며 중국인들이 처한 비극적 현실에 눈뜨게 된다. 1922년, 주더는 구습에 익숙해져 있던 과거의 자신과 단절을 선언하고
공부와 여행을 시작한다. 독일과 프랑스에 머물면서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으며,[4] 1925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공산당에
들어오게 된다. 주더는 1차 국공합작 결렬 이후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에 거부 의사를 표명한다. 반란군의 일원이 된 주더는 판스성의 보호를
받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에 이른다.
주더는 소규모 부대를 가지고 1928년에 징강 산에 주둔하고 있던 마오쩌둥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홍군의
총사령관 위치에 오른 주더는 국민당 군대의 토벌작전을 따돌리며 홍군이 대장정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 역시 홍군의 여타 지휘관처럼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병사들보다 특별한 대접을 받고자 하지
않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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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노는 회족이 홍군에게 협조한 것이 공산당을 역이용하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며, 적어도 군사적 자치권만은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지만, 그는 어떤 근거로 회족 사람들의 심중을 파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3] 강아지라는 뜻으로 주더 집안 사람들이 어릴 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4] 독일에서는 학생 소요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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