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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겨진 방법들 에레혼 문제적 저자 미조구치 유조의 문제적 저작답게, 《방법으로서의 중국》에는 방대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각 장의
중심 주제는 다를 수 있지만, 저자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은 책 전반에 일관적으로 펼쳐진다.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하는 미조구치 유조식 중국 연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조구치 유조의 목표 의식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1장에서 3장까지의 구조는 연쇄적으로, 근대에서 근대상으로, 근대상을 논하며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 봉건이라는 개념으로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제 1장: ‘중국의 근대’를 보는 시각 중국을
공부하다 보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밀월 관계’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이런 착각이 강화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이뤄지는 공식 행사에서 동아시아 3국을 병기할 때에는 열에 아홉이 ‘중∙일∙한’ 순서이다. 중국과 일본 양국 사이 유대감은 특히
학문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일본의 중국학에 대한 열망, 일본학자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중을 바라보면 소외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1장 ‘중국의 근대를 보는 시각’에서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소외감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
“일본이
현대화한 데 반해 현대 문화의 세계에서 뒤떨어진 것이 중국이다”류의 전전戰前적인 중국 인식은 이 시점에서
선진=후진의 도식과 함께 근본에서 일소되고, 선진 근대의
일본은 그 반민주주의적∙제국주의적
본질로 인해 부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뀐다. // 근대 결여의 낙오자일 터인 중국이 오히려 그 결여를
용수철로 삼아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제 3의 ‘왕도’적 근대를 자기회생적으로 실현해보였다는 신선한 놀라움이 전후
중국 인식의 저류를 이루었다. 16쪽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양차 대전 종전 이후 일본의 근대상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에 대한 평가는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같은 문명국 반열에 접어들었다[脫亞入歐]’는 문구로 대표된다. 하지만 일본의 진보층은 이러한 서구식 개혁을
구조 변혁을 이뤄내지 못한 좌절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이와 반대로 좌절을 거듭한 중국의 근대를 조롱거리로
인식하던 상황은, ‘어쨌든 성공을 거듭하는 현대 중국’이란 현상에 발맞추어 역전된다. 그러한 좌절 덕분에 중국에는 비유럽적인 고유성이 존재한다는 진단이 뒤따르는 것이다. 미조구치
유조는 일본 진보 지식인 그룹의 중국 근대 분석법에 반대한다. 이 반대 주장의 기저에는 유럽의 근대
개념으로 동양(중국)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깔려있다. ‘중국의 근대=비유럽적’이라는 도식에는 중국 근대에
개인/인권이 부재함을 전제한다. (반면에 일본의 근대는 서구추수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의
근대도 나의 일본적 독자성에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역시 그 자체의 전근대를 모태로 삼음으로써 그 나름의 모반을 갖는다…”
27쪽) 책의 1장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근대에 대한 반성으로, 중국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는 일마저 유럽을 기준 삼아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필시
유럽 자신이 스스로를 칭하면서 비非 아시아적이라고 표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처음부터 아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지나치게 자명한 것으로 삼고 있는 데다, 더욱이 아시아를 하나의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살피는 데 그들은 자신들의 자각에서 너무나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시아 측에 한해서는 자신을 유럽 회로의 눈으로 다시 파악하고, 자신이 유럽적인지 아닌지를 혹은 비유럽적인지 아닌지를 가치를 담아 묻는 것은,
세계사를 유럽 중심에서 보아 온 근대 이래 유럽 측의 일원적 시각이 얼마나 깊이 아시아 속에 내부 침식해왔던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쪽 제 2장: 근대 중국상의 재검토 두번째
장에서 미조구치 유조는 조금 더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중국의 근대를 보는 시각’에서 핵심은 중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단계적 사건으로 논의되어 온 ‘수구(근대 이전)→양무→변법→혁명’의
구도를 타파하는 데에 있다. 중국의
근대에 대한 분석은 단순화하자면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으로 나뉜다. 전자의 입장은 유럽의 근대에
맞춰서 중국을 해석하려는 태도이기에 익히 비판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시각이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 근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1장에서
살펴본 근대 중국이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부터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하여 중국을 바라보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석법에
대해 책에서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서 비판을 가한다. …이
가설은 총체로서 하나의 틀을 공유하고 있으며, …… 틀은 역사를 발전 또는 진보라는 기준으로 파악하고, 그 발전∙진보의
추형을 유럽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봉건보다는 근대, 전제보다는
입헌, 나아가 공화, 황제보다는 인민.
41쪽 …‘먼저
유럽적인 중국론을 검토하고, 그 위에서 그것을 뒤집는’ 것,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부정적 규정의 중국론을 이른바 뒤집어서 적극적으로
규정’해보이는 것,… 44쪽 결국
중국의 근대에서 의의를 발굴하려는 모든 태도는 유럽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미조구치 유조는 ‘양무-변법-혁명’의 순서로 중국 근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중체中體’의
붕괴 과정을 드러내는 것, 다시 말해 유럽 수용의 심화정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반대로 말하면, 구중국에 대한 부정의 정도를 그러내는 것, 결국 구중국과의 단절의
정도를 그러내는 것47-48쪽이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중국 근대의 각 단계에 누적과 변화가 뚜렷한 것도 아니다. 예컨대 ‘변법’ 단계에서 주장되었다고 알려진 의회 제도는 양무 운동 시기에 이미 논의되어온 바이다. 미조구치
유조가 기존의 방식 대신 주장하는 중국 근대 분석틀은 ‘기체전개론’이다. 여타 중국의 근대에 대한 분석
방식이 각 사건마다 중국 사회 전반에 나타난 변화상에 주목한다면, 미조구치 유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은 부분’에 집중한다. 책에서는 중국식 마르크스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공’이라는 개념이
중국 사회에서 유가적 지식인의 경세 이념과 맞닿아 있음을 지적한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총괄적으로 아시아의 근대를 생각할 경우에 서양의 충격을 받기 이전의, 전근대기의 역사적 요소를
바탕으로 그것의 변화 내지 전개의 양태를 독자적인 면에서 우선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64쪽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은 책에서 양무을 중국 근대사의 가장 큰 변화라고 언급한다는 점이다. 미조구치
유조의 양무운동에 대한 강조는, 8-90년대 일부 중국 지식인 그룹이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을 긍정하는
것과 또 다른 동인을 갖추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리쩌허우 등의 사상가들은 중국 혁명의 급진성과 폭력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의 중도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긍정한 바 있다. (리쩌허우∙류짜이푸, 《고별혁명》) 하지만 미조구치 유조의 경우 양무운동은 중국이 별개의(異) 문명을 도입하면서 스스로의 구조를 개혁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 책에서는 청말에서부터 문혁 후 현재(아마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들을 유사한 구조로 인식하는 셈이다. 제 3장: 중국의 ‘봉건’과 근대 ‘봉건
잔재’, ‘봉건 잔당’과 같은 표현은 ‘고급스러운 중국어 욕설’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용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봉건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미조구치 유조는 중국 역사 속에서 봉건이라는 단어에 긍정적이고 개혁적인 뉘앙스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명말청초 황종희, 고염무 등의 지식인들은 봉건제를 재해석하여 황제
권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급부상하는 지방 지주 계급의 목소리를 이론에 담아냈다. 봉건 개념에 혁신이라는
의미가 담긴 사례는 19세기 말엽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캉유웨이
등의 개혁지사도 인물도 봉건을 지방자치에 연결시키는 주장을 남겼다. 봉건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이미지가 덧입혀진 것은 서구의 침탈이 반복적으로 일어난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중국 고대를 통틀어 봉건사회로 묶어버리는 관습과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 옌푸에 의해 중국 사회로 유입된 역사구분론, 역사발전단계론의 개념은 봉건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종법∙봉건이 여기서(101쪽에 인용된 천두슈의 글)는 중국에 입각하여 시대구분상 고대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그 위에 현대에 아직 화석처럼 온존하는 유물이며, 고대가
현대에 온존하고 있는 그것이 중국 역사의 단계론상 뒤처짐이라는 발전단계론적 인식이 되었다.” 101-102쪽 천두슈의
글이 쓰이는 시기와 동시대적으로 봉건이라는 단어는 중국 사회에서 사회 변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였다. 그러나
중국 전반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5.4운동의 미명 아래 봉건이라는 단어에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봉건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이러한 의미 전복에 대해서 미조구치 유조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봉건’
두 글자에 부정적 뉘앙스를 배가하는 데에 주요 역할을 한 인물인 마오쩌둥도, 혁명에 가담한 초창기에는
‘지방자치로서의 봉건’[1]을 논하고 있다는 점.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러한 개혁적 의미의 봉건은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쓸모없는 개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폐기되었다. 정리하자면, 미조구치 유조는 ‘봉건’ 키워드를 통해 2장에서
언급한 중국기체론을 예증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 외부의 관점만으로 중국 근대를 해석하는 방식을 경계한다. “이를 위해서(=중국을 ‘안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대구분론이나 발전단계론은
보류해두고, 적용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10쪽 미조구치 유조식으로 말하면,
봉건은 방법적으로 동원된 개념일 뿐이다. 《방법으로서의
중국》은 80년대에 출간된 책이기에 지금 보면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느낌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중국학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읽기에 괴리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을 외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만연하다. 중국
혐오가 만연한 요즘에는 안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방식은 ‘합법적으로’ 배제된다. 허물을 벗는다고 하더라도
파충류가 다른 동물이 되지는 않는다는 미조구치 유조의 지적은 여전히 중국을 바라보는 유효한 관점이다.
[1] 마오가 발표한 문건의 제목에서는 봉건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이전 중국 사회의 전통적 봉건 논의와 상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