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철학 입문》 1장 페미니즘 철학은 무엇인가: 페미니즘 철학과 보편적 인간에 대하여 페미니즘 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페미니즘 철학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개념 정의나 합의를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철학이나 페미니즘 모두 우리에게 낯익은 단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동시에 우리 각자에게 페미니즘은 철학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이렇게 낯익으면서 혼란스러운 개념이 꼭 문제가 된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알고’ 있는 개념이기에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소통이 어긋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에는 서유럽의 근대 이후 철학이 주로 해당한다. 서구의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이는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Cogito, ergo sum(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은 진리를 찾기 위한 인식의 출발점을 ‘생각하는 나(사유 주체)’로 본다. 자신을 인식하고 지식을 확인하는 나(주체)는 인식의 근거이자,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이성을 가진 주체로서 인간은 지식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보편적 인간이 된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타자의 철학은 이 ‘보편적 인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같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백인과 유색인종, 유럽과 아시아, 귀족과 노예,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아무리 유럽 백인 성인 남자가 ‘보편적 인간’에 대해 말해도, 어떤 이들은 경험으로 그 ‘보편적 인간’에 자신이 속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은 18세기 유럽에서 부르주아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보편적 인간’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영원하고 확실한 지식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런 지식을 진리라 부른다. 진리는 우리 존재의 경험이나 맥락, 역사성과 무관하다. 보편적인 지식은 진리를 확립하는 문제와 연결되고, 서구 철학은 오랫동안 경험과 무관하며 인간 존재를 초월한 진리의 문제에 골몰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지식이 있을까? 근대철학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난다. 포스트모던은 그렇게 시작된다. 주체에 대한 의심, 진리에 대한 의심, 철학에 대한 회의. 이제 보편적 인간에 대해 말하지 않는 철학이 시작된다. 주체에 대한 비판은 근대철학의 기준점에 대한 비판이다. ‘생각하는 나(사유 주체)’와 이성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며, 합리적인가?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이나 무의식은 무엇인가? 인간 이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너무나 쉽게 우리는 자신 안의 타자를 목격하게 된다. ‘생각하는 나’가 정신을 대변하면서 신체를 멸시해왔다면, 주체(동일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던 이들은 타자로 취급되었다. 우리 안의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영역, 우리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인,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분은 타자이다. 동일자 (주체)는 자기의 인식역량 밖에 있는 존재를 타자로 본다. 동일자가 보기에 타자는 언어를 가지지 못했기에 동일자가 해석해주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동일자가 발견하지 못하고 해석하지 않은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백인과 상관없이 유색인종은 살아가고, 남자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여자는 이미 타자로 존재한다. 오히려 미지의 영역에 있던 타자를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동일자 (주체)는 자기 인식을 넓히고, 사유 방식을 변화시킨다.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타자는 괴물처럼 동일자를 위협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역경을 극복하는 주체는 영웅이 된다. (36쪽,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포스트모던 철학은 보편 철학의 무용함을 인정하고, 타자에게서 힘을 얻으려 한다. 타자는 서구 철학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철학의 목적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시하는 데 있다면, 타자의 존재야말로 이런 철학의 목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려고 할 때 철학은 일종의 틀과 같은 도구로 쓰인다. 변화하는 존재들로 가득 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보는 일이 변화 없이 고정된 도구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타자는 철학이라는 도구를 변화시킨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철학 자체가 동일자의 도구이기에 꼭 그 도구를 변화시키는 일에 복무할 의무는 없다. 다만 타자가 자신이 그 세계에서 타자였음을 인식하고 자기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도 철학이라는 도구는 유용하다. 여성이 만들지 않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었던 도구를 부수어버리는 대신 자신의 도구로 삼는 일. 타자의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들만의 의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구조 안에서 차별이나 억압을 받는 모든 존재의 의제이다.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일은 곧 자신이 이 세계의 타자임을 아는 일이다. 타자의 철학은 단지 세계에 반대하는 일이나, 자신을 동일자 (주체)에 속하게 만드는 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타자의 철학은 세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그동안 배제되었던 타자의 경험, 신체, 정념을 철학의 언어로 사유하려 한다.
페미니즘은 타자의 철학으로서 철학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새로운 사유 방식을 만들어낸다. 철학이 스스로 회의하고 갱신하고 변형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한다면,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은 ‘탈맥락적 보편이라는 말의 허구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현대철학과 공통점을 가진다. 이제 철학은 ‘우리 모두가 타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철학을 구원할 타자의 철학으로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철학이 추구해야 할 방법과 태도를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