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타자로서 여성을 정의하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길
이번 장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을 살펴보고 있다.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제2의 성으로 만들어냈는지, 어떻게 타자의 위치로 만들고, 그것을 오랜 기간 여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내면화시켜 사회 일반 개념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는지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1908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1949년에 이 책을 쓴 보부아르가 말하는 70여 년 전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여성들과 '비슷'하지 않냐고 되묻는 저자의 물음에 난 아니라고 대답했다. 비슷한 게 아니라 계속 더 내면화되었고, 좀더 교묘하게 제2의 성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역시 ‘타자'이다. 타자는 ‘어떤 집단이든 대척점에 있는 타자를 세우지 않고서는 단일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 말은 외부의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동일성을 획득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부아르가 봤을 때 인간이라는 어떤 본질, 그것은 바로 남성을 나타내는데 남성인 인간이 단일하고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타자성을 여성으로부터 끌어온다. 그래서 언제나 여자는 제2의 성이었고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었다. 프랑스어로 ‘homme(남자)’은 인류 전체를 가리키며, 라틴어의 ‘vir(남자)’역시 인간의 전체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여자는 오로지 음으로만 여겨지기에 온갖 규제가 가해지며 성적인 존재로 요구당해왔다.
저자는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에서 중요한 말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여성은 자궁과 출산 능력이 있기에 공격적일 수 없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물학적인 결정론'이 여성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성이라는 것은 사회가 여성을 그렇게 ‘만들어’냈고, 그런 식으로 ‘교육시킨’ 것이며 그렇게 역사를 만들고, 여성의 원초적인 어떤 여성성이 있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역시 보부아르의 비판 대상이 되는데 그 안에는 가족과 재생산을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인간 남성을 기본 모드로 만들어내는 중요한 장치로 가족과 재생산을 꼽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 억압의 본질이 가부장제, 가족, 재생산, 어머니에 있다는 통찰을 준다.
실존주의에서 타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유의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유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데 주체가 필연이면 타자는 우연이다. 주체는 기필코 언젠가 죽을 존재인 자신의 유한성을 박차고 필연인 자유의 영역으로 자신을 던진다. 하지만 타자는 우연적 실존 안에 갇힌 비자유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타자 없는 주체는 주체로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타자를 설정하는 문제이고 타자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체가 될 수 없기에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면서 서로 주체가 되려 한다. 그런데 보부아르는 남녀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인데 여성은 왜 한 번도 남자에게 저항을 안 하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는다. 첫째, 여성인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었다. 둘째, 자신들끼리 정체성을 공유하거나 연대감도 갖지 못했다. 여성들은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여 있으며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들의 사회적 신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보다는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 사이에 분산되어 살고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과의 관계가 사회의 그 어떤 제도나 굴레보다도 더 원초적이고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 최초의 공존 한가운데서 나타난 이 대립을 여성은 깨뜨려본 적이 없다.
지금 내가 왜 여기 살고 있을까? 내가 뭘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여기 나의 상태를 넘어서는 욕망과 자기 초월의 의지와 나의 실존에 대해 해명하는 삶. 바로 보부아르가 말하는 행복이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물어야 하는 실존적 고민과 사유에 대하여 누군가가 이를 억압하고 저지하는 것은 ‘절대악'이라고 말한다. 주체로서 자유로운 기투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 역시 ‘전락'이자 ‘도덕적 허물’이다. 남자들이 여성들울 타자로 살도록 강제하는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자기를 발견하고 선택해야 한다. 객체로 고정되지 않도록.
보부아르는 이제 자기의 이야기, 여성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여성스러움의 신화를 뒤엎고 자신들의 독립성을 구체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인간 존재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살리는 삶을 논하자고 한다. 그리고 여성의 통상적 운명으로 여겨졌던 결혼 문제를 짚어낸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남성의 경제적, 사회적 위신을 세우고 여성을 굴종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는 제도라고 역설하는데,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비혼을 선언하는 움직임들이 보부아르의 여러 질문들을 환기시킨다. 많은 이들은 결혼을 개인간의 사적인 결합이라 생각하지만 국가에게 승인을 받아야만 법적으로 보장과 보호를 받는 제도이다. 또한 사회에게 결혼이란, 새로운 결합을 통해 국가의 새로운 시민의 단위가 열리는 문제이고 사회적 재생산의 도구이다. 제도와 구조, 관습과 역사가 여성만의 인내와 희생, 굴종을 요구했던 수많은 상황 안에서 어떻게 여성의 불행이 싹 트는지를 보여주며 보부아르는 이제 여기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인 적이 없었고, 결코 자유로운 적도 없었던 여성들이 이제는 탈출할 수 있도록 남성들도 함께 해야 하며, 그것이 진정한 인간 자유의 표현임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양성평등이라는 슬로건 아래 은밀히 더 진화되고 있을지도 모를 여성의 타자적 위치와 내면화되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세심한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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