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에세이] [홍루몽]아무 것도 아닌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의 아무개2019-12-2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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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설 <홍루몽> 세미나 에세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의 아무개


중국소설 <홍루몽> 읽기를 마쳤다. 총 6권 120화로 이뤄진 대하소설이었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 중 큰 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가보옥이라는 조금은 특이한 소년과 임대옥이라는 소녀의 로맨스이고, 다른 하나는 돌이었던 주인공이 어떻게 다시 돌로 돌아가느냐의 양상이다. 물론 다른 줄기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분들도 많으리라 본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전부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설이니 말이다. 두 가지를 큰 흐름으로 읽는 것은 나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사연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가지 줄기로 요약해본 줄거리는 이렇다. 옛날 어느 때에 어떤 이가 돌을 달구어 하늘을 때우다가 남은 한 개의 돌이 있었다. 돌은 한번 달구어졌던 터라 신통하게도 혼자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돌이 홍진세계를 염원하니 도사와 스님은 “좋은 일”이라며 인간 세상을 경험해 주기로 한다. 돌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옥을 물고 태어났다. 옥을 물고 태어난 아이는 대갓집 남아로 총애를 받으며 부족할 것 없이 자란다. 당대의 남아로서 가져야 할 입신양명의 대업은 이 아이에겐 하찮고 멋없는 것이었다. 아이는 자매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함께 시를 짓고 노는 것에 심취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인물이 출중하고 재주도 뛰어난 자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결국 이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아이는 청년이 되어 과거에도 급제하지만 그 길로 출가하여 사라지고 소설도 끝을 맺는다. 홍진세계를 염원하던 돌이 홍진세계를 다 경험하고 난 후의 감상이 어땠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달은 후 무대에서 사라질 뿐. 주인공이 사라진 이후에도 다른 이들의 삶은 또 계속되겠지만 하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 


“가짜같은 진짜 이야기, 진짜같은 가짜 이야기”라는 소설 속 설명이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하나의 지어진 이야기 안에서 또 삶이라는 이야기가 겹겹이 펼쳐졌다. 장대하게 펼쳐지던 이야기가 주인공의 깨달음으로 한 순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딱 우리네들의 에누리없는 생사와 닮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애닳고 아프고 기쁘고 즐거울 때마다 따라 울고 따라 웃지만, “결국”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를 미리 내다보면서 소설을 읽는다. 결말을 대략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그러니까 그가 삶이라는 것을 경유하는 동안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겪어내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뻔히 “죽음”이 결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누군가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소설을 읽었다. 어리석은 듯 열정이 넘치고, 비범한 듯 하면서도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은 과연 이 홍진세계를 어떻게 경험했을까. 아리송한 문답만을 남긴 결말이 아쉬울 뿐이다.


<홍루몽>의 시작은 삶 이전이고, 끝은 삶 이후이다. 두루뭉술하고 아리송한 삶 이전과 죽음 이후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상상의 영역이다. 전생에 어땠다느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문제는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그 이야기들에 살아있는 동안 줄곧 영향을 받는다는 부분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보다, 그렇게 살면 죽어서 천벌 받는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등 삶 이전과 이후의 것들이 끊임없이 삶을 넘나들고 있다. 윤리와 도덕, 종교의 이름을 빌어 삶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삶 이전과 이후의 어떤 것들. <홍루몽>의 시작과 결말을 보면 삶 이전과 죽음 이후를 아는 것이 운명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을 알고 난 후의 주인공의 행동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태도와는 사뭇 달라진다. 입신양명보다는 미와 예술을 찬미했던 자가 과거 급제를 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과거를 준비하면서도 이미 자매들을 대하는 태도가 냉랭해져 있었다. 오늘 즐거울 것과 당장 내 앞에 있는 자매의 기분이 중요했던 자가 나라와 가문을 위해 자신이 원치 않던 길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운명을 아는 것과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을 없던 것처럼 여기는 것이 과연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자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과거에 급제하고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일이었음은 좀 황당무계하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고작 입신양명과 삼강오륜인 것일까.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조설근)와 이야기를 끝맺은 작가(고악)가 다르다는 사실이 이런 삐걱거림으로 감지된다. 


어쨌거나 애초에 황당무계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돌이 인간이 되어 살다가 아무것도 아닌 돌로 돌아가는 이야기.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서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를 엿보고, 관습을 초월한 시대의 진보를 엿보았다고 한다. 혹자는 가부장 권력의 허술함과 그것을 보위했던 내명부들의 치열함을 얘기하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든 그것은 돌의 이야기 속에서가 아니라 돌이 사람이었을 때에 의미를 둔 것이다. 삶 이전과 죽음 이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들 말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버렸다고 해서 달라질 수 없는 삶의 구체적인 의미들이 있다. 내가 한낱 돌이었음을 알았다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은 것도 아니고, 결국 돌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애인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에서 아무개로 살아간다고 한들 오늘의 희로애락이 기쁘거나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 조설근은 도사와 스님이 말한 “좋은 일”로 홍진세계의 신비(?)를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닌지 짐작해본다. 몇 겁의 세월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아무개의 구체적인 오늘 하루는 <홍루몽>의 가짜같은 진짜, 진짜같은 가짜 이야기로 꽉 채워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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