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들의 놀이터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다. 호기심에 앱을 깔았다가 쑤욱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기사를 보니 초대장이 필요하고 어쩌구저쩌구 그러던데, 가입하자마자 등록이 되더니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캐나다에 사는 동문과 몇 년 만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캐나다 시골 깡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였는데, 그곳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단다. 시공간을 단박에 뛰어넘는 경험에 얼얼했다.
아뿔싸! 어지러이 헤매는 동안 주소록이 통째로 동기화가 되고 말았다. 즉 내 주소록에 있는 이들의 명단이 주르륵 뜨는 거다. 나보다 앞서 가입한 이들도 적지 않더라. 그 이야기는 반대로 내가 가입했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알려진다는 것. 젠장, 은둔자로 좀 지내려 했더니 영 글러버렸다.
인싸들이 노는 공간이라니 나도 인싸가 되어보자. 후회는 빨리 잊고 본격 홍보 모드. 일단은 자기소개글을 뽐나게 적어야 한다. 눈치껏 다른 사람들 것을 보니 센스 있게 적어둔 소개도 있는가 하면, 제 전공이나 공부 분야를 적어놓은 것도 있더라. 학위를 적어 놓은 것도 있고…
Philosopher, 누군가의 자기소개글을 보다 문득 지나간 과거를 깨우친다. 맞다, 나도 철학을 전공했었지. 그러나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옷 같다. 영어로 적어놓은 것도 볼썽사납지만 '철학자'라고 표기하려니 기괴함이 앞선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철학을 이야기하는 데에 들어갔다. 현상학이 어떻고, 퐁티와 들뢰즈가 어쩌구저쩌구… 누군가 말을 시켜 입을 떼었는데 별 할 말이 없었다. 철학을 공부했지만 동양철학을 공부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철학과에서 공부한 몇 년의 시간은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간단히 요약하면 '철학이란 남의 것'이라는 이라는 인상만 얻었다. 철학을 이른바 동철(동양철학)과 서철(서양철학)로 나누지만 이는 어느 정도 균등한 구분이 아니다. '철학'과 '철학 아닌 것'으로 나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철학과에서 공부하는 내내 동등한 학문 분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철학과에서 철학을 공부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금도 철학 전공자라고 잘 말하지 못한다. 동양사상을 공부했다고 하자. 아니면 고전을 공부한다고 하던가. 그래도 요즘에는 철학을 한다고 말하려고 하는 편이다. 왜? 이른바 '관종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돋보이는 자가 승리하는 것 아니겠나.
<Freedom, 어떻게 自由로 번역되었는가>의 말을 빌리면 카세트(보석상자) 효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야나무 아키라는 서구의 개념이 번역되면서 왕왕 그 뜻이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반짝 거리는 보석상자처럼 그 속에 무엇이 들었든, 그 의미가 무엇이든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뭔지 모르지만 멋있어!' '철학' 역시 그렇지 않나. 그러니 철학을 배우지 못했다는 소외감을 던져버리고 철학이라는 번쩍거리는 옷을 입자.
'존재'란 뭔가 심각하고 고상한 의미를 지닌 것 같은 효과를 내는 '카세트'와 같은 단어다. 예를 들어 '내가 있다'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면 왠지 접근하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식이다. (145쪽)
저자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문장을 인용한다. 우리말로는 흔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옮긴다. 이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라는 식으로 옮기려니 영 어색하다. 예를 들어 <존재와 시간>이란 책은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있음과 시간>은 좀 격이 떨어져 보인다. <소유냐 존재냐>, <가짐이냐 있음이냐>.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 <존재와 사건>, <존재와 일어남>...
번역어 '존재'의 탄생,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논의를 보면서 한때 주창되었던 '우리말로 철학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떠올려본다. 이는 이중의 번역, 서구 번역어와 한자어라는 두 겹의 장막을 걷어내야 가능할 테다. 100여 년 전 번역된 서양 개념어를 이해하기도 버거운데 한자어를 벗겨내고, 혹은 한자어에서 떨어져 우리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 말이 뼈 아프게 들린다.
즉 번역에 적합한 한자 중심의 표현은 한편으로는 학문이나 사상 분야에서 번역에 적합하지 않은 순수 일본어로 된 일상어 표현을 내팽개치고 내동댕이쳐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철학은 일본인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의미와 괴리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기본 자세와 상반되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철학의 기본 태도와도 상반된다. (153쪽)
뼈 아픈 소리는 뼈 아픈 소리로 넘기고 철학자의 옷을 입자. 바야흐로 '관종의 시대'에는 philosopher의 명함을 내밀어야 눈에 띌 것이 아닌가. 철학자의 옷을 입었는데도 영 목소리를 내기가 쉽진 않다. 예를 들어 '칸트와 미학'의 제목을 붙인 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본색을 드러내어 목소리를 내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제목을 만들었다 치자. '공자와 천명' 공자가 이야기한 '천명'은 곧 도道, 우주의 생성원리인데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성性으로, 그 가운데는 인仁이 으뜸이어서 끊임없는 생성을 낳는데… 내용 이해는 차치하더라도 공자니 생성이니, 우주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입은 옷은 칸트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입은 옷과 아무래도 좀 다를 것 같다.
어떻게 다른지는 접어두고 유불리를 따지자. '관종의 시대'에 공자니 장자니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 내 생각에 여전히 철학의 전당에는 끼지 못하겠지만 사람들을 여럿 불러 모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뭔가 심오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좀 다른 의미에서 '잘 모르지만 멋있어'가 되겠지. 저자는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이기는 하되 여기에는 동양 고유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말한다. 대상으로서 객체가 되는 'nature=자연'이 있는가 하면, 주체와 객체를 뛰어넘는 '저절로 그러한=자연'이 있다.
… nature는 객체에 속하면서 인위와 같은 주체와 대립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자연'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제거한 듯한, 이른바 주객미분, 주객합일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64쪽)
문제는 이 뜻이 혼재하여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의미라고 할만한 번역어 특유의 효과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저자는 '자연주의'의 예를 든다. 이는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지만 일본에서 사용될 때는 또 다른 의미가 덧씌워졌다.
자연스러움과 탐구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의미가 뒤섞였을 뿐만 아니라, 주체 혹은 인간을 해석하는 방식도 뒤섞였다. 예를 들어 <노자>를 강독할 때, 사람들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풀과 나무가 우거진 자연을 으레 떠올린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도가적 의미의 자연, 주체와 객체의 통일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새로운 의미의 자연이 튀어나오고 만다.
뭔가 특권화 된 자연이라고나 할까? 동양의 철학자들은 으레 자연과 친할 것 같고 친해야만 할 것 같은 인상은 이러한 번역과 이해의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테다.
이와 비슷하게, 철학자로서 공자나 장자 등을 다룬다고 하면 이성과 감정의 대립을 뛰어넘어 뭔가 더 심오하고 오묘한 이야기를 들여줄 것을 기대받는다. 이른바 '철학의 대중화'라고 할 때, 서구철학이 이해에서 감동을 이끌어낸다면 동양철학이 감동과 교훈으로 바로 직행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구조일 테다.
그래서 생각한다. 철학자 노릇하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