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플라톤의 '국가'] 정의, 국가, 신2019-10-0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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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제2권 발제

 

트라쉬마코스가 떠난 자리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차지했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바람과는 달리 전혀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진척되지 않았다며, 논의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소크라테스의 역할이다. 우리가 아는 수다쟁이 소크라테스는 없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논쟁을 어서 끝내고 싶어 안달이다. ‘토론에서 벗어났구나’ 싶어 기뻐하지만, 글라우콘 형제는 소크라테스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저는 배우는 게 더딘가 봐요.’라고 약한 척도 해 보고 모르는 척도 해 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글라우콘 형제는 소크라테스가 좀 더 치밀하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 줄 것이라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신뢰감의 정체는 또 뭘까?

 

천하의 소크라테스에게도 토론은 괴로운 일이다. 토론의 목적이 상대를 설득하거나 굴복시키는 데 있다면, 이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싸움에 가깝다. 트라쉬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토론이 그런 식이었다. 판결을 내려줄 심판이 없는 토론은 대부분 둘 중 하나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끝나게 마련이다. 그때쯤이면 토론을 관전하던 이들은 이미 지친 지가 오래다. 그렇다면 트라쉬마코스와의 토론으로 지쳐 나가떨어진 소크라테스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말하도록 만드는 글라우콘 형제의 의욕은 과연 어디서 샘솟는 것이며, 그 의도는 무엇일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정의가 그 자체로서 좋고, 결과도 좋은 것’이라는 논증이다. 정의가 좋은 것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즐거움만 주어서는 안 된다. 유용함이나 다른 혜택 때문이어서도 안 된다. 형제는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증을 이끌어내기 위해 불의에 대한 논증을 길게 늘어놓는다. 세속의 불의가 정의를 이기고 신마저 미혹시킨다는 이 논증은 자칫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두 사람의 태도는 소크라테스가 이야기를 시작할 지점을 만들기 위해 포석을 까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전에 나올 수 있는 모든 반론의 여지를 가능한 차단함으로서 소크라테스의 논증에 더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셈이다.

 

불의한 자들이 사람들을 속여 올바르다고 칭송받고 재산을 모아 신에게도 축복을 받는 세상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일은,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나 21세기의 우리나 매한가지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궁금해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정의와 불의를 알아보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자신의 올바름을 누군가가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억울함, 그래서 차라리 불의하게 살겠다는 비뚤어진 마음을 합리화하는 데만 급급해 보인다. 그 합리화의 이면에는 자신이 올바르다는 전제도 깔려있다. 자신의 올바름과 대비되는 타자들의 불의함. 타자들의 불의함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은 자신이 올바르다는 확고한 전제보다도 더욱 기이하게 다가온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열심히 밑밥을 깔아놓고, 이제 슬슬 소크라테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력이 안 좋은 우리를 위해 작은 글씨 대신 큰 글씨를 보여주시겠다며, 논의의 대상을 국가로 옮긴다. 물론 논의 안에 있는 국가는 아직 소규모 공동체나 작은 도시국가이다. 정의를 말하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적성과 적기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유용함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자기 적성에 맞는 한 가지 일을 적기에 해야 한다. 저마다가 이렇게 자기 일에 매진하면서 국가의 규모가 불어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평화로운 상태에서 정의와 불의가 주민 가운데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정의와 불의는 외부에서 누군가가 가져오는 게 아니라, 주민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안타깝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국가, 건강한 국가는 소규모로만 존재한다. 고기를 포함한 진미를 맛보려 하고, 하인을 부리고,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사치를 누리려 할 때, 국가는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국가 간에 전쟁이 시작되면, 국가는 언제든 침략자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군대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갑자기 국가를 수호하는 이들(군인)의 자질에 대한 논의로 변경된다. 듣는 이들에게는 갑작스러운 변경일 테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변경은 소크라테스가 처음부터 의도한 듯 보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를 위해 열심히 밑밥을 깔던 두 형제는 이제 미리 짠 것 같은 리액션으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난데없이 소크라테스는 수호자가 기개와 더불어 철학자의 기질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수호자들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야 할지 설계해보자고 요청한다. 여기서 다시 논의는 허구와 사실에 대한 교육 속으로 빠져든다. 아버지가 아들을 미워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신들의 이야기, 가족끼리 서로 미워하고 괴롭히며, 거짓과 복수를 일삼는 신들의 이야기는 수호자들의 교육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선하다면,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일 뿐 모든 것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좋은 것을 제외한 나쁜 것의 원인은 신이 아니기에, 신은 그 나쁜 것에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쁜 것의 원인과 책임은 신이 아닌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서사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난은 계속된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모습을 바꾸어 등장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좋은 것의 원인이며 가장 용감하고 지혜로운 신은 모습도 바꾸지 않고, 외부의 영향에 동요하지도 않는다. 모든 좋은 것은 다 그렇다. 가장 완벽한 상태이기 때문에 신은 변화를 원하지도 않는다. 신은 무지할 수 없으므로, 허구를 지어낼 필요도 없다. 무지와 광기, 거짓은 신의 친구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마침내 신이 단일하며, 신의 말과 행동은 진실하다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 논의는 뜬금없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와도 전혀 다르다. 오히려 여기서 묘사되는 신은 기독교의 유일신과 흡사하다. 단일하고 진실하며 모습을 바꾸지 않는 신. 서사시 속 신들을 없애고 소크라테스가 만들어내려 한 유일신의 이미지에서 정의의 유용함은 사라졌다. 진리나 정의의 독선만이 남았을 뿐. 이게 소크라테스의 의도인지, 플라톤의 장난질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국가》의 제2권은 이렇게 끝난다. 제1권이 끝날 때 갑자기 ‘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처럼, 제2권의 말미에는 갑자기 시대에도 맞지 않는 유일신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제 제3권의 말미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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