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북토크] 후기: '각별한 시선'이 없으면 뭣 하러 쓰나2019-11-1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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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났습니다!

지난 11월 14일 목요일 밤 실험실에서 있었던 최현숙 선생님과의 북토크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최현숙 선생님의 이야기

 

나의 글에는 ‘아버지를 미워한 힘으로 내 길을 만들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나를 낳은 생물학적 아버지이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규범’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를 오랫동안 이 아버지라는 규범에 대한 공통의 피해자로 바라보았다. 가족을 미워하고 배반해본 경험들을 지나온 후 나는 어머니를 ‘선배여성’으로 보기로 했다. 가족에 대해 느끼는 바를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 변하더라도 일단은 입장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흔이 넘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쓰기는 방황과 혼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글쓰기에는 어떤 입장이 있었다. ‘맞았다’가 아니라 ‘싸웠다’, ‘피해’가 아니라 ‘저항’. 그런 입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한 사람들과 곧 죽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을 쓸 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내가 이 사건과 인물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각별한 시선'이 없으면 뭣 하러 쓰나. 몇 명이 읽더라도 이 시선을 남겨야 한다 싶을 때, 독자를 만날 필요가 있는 글을 쓴다.

 

시선은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남들이 떠드는 것은 일단 다 의심하고 봐야 한다.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어떻게 보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근거를 나름대로 제시한다. 시선을 벼리기 위해 담론을 공부하기는 하지만, 공부가 주는 아니다. 최대한 내 아픔, 내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그 자리가 내 힘이 된다. 그것들이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를 본다. 상처가 곧 힘이고, 해명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해명. 타인에 대한 기록 작업을 할 때도 나에 대한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덧붙이는 삼월의 이야기

 

벤야민은 부르주아지의 가정을 복마전(악의 근거지)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아마도 부르주아지의 가정을 흉내 낸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가정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가정 안에서는 계급과 젠더가 재생산되고 강화되는 것은 물론, 개인에 대한 신체적이고 규범적인 폭력이 시작된다. 가정 안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거나 누군가를 착취하며, 이 착취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미화된다. 그렇게 가족은 우리를 성실한 국민, 성실한 노동자로 키워내어 이 사회에 바쳐왔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가족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주 고통스럽게 가족 곁으로 이끌려 들어가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우리를 알고도 당하게 했을까? 가족에 대한 입장을 묻자 ‘필요 없다’는 말이 단호하게 튀어나오는 최현숙 선생님. ‘가족은 자연재해’라는 농담 섞인 선생님의 말에 나의 지인은 어디서도 얻지 못한 위안을 느꼈다고 했다. 피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자연재해, 내가 책임질 수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대상. ‘효라는 애매한 단어’에 얽매여 상처받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만한 위로는 없겠다. 어머니를 ‘선배여성’으로 본다는 표현에서는 《작별 일기》 안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냉정함 사이 어드메에 있는 독특한 정서가 많이 이해되었다.

 

최현숙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꼭 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글이 가진 매력은 본인의 언급대로 독특한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나는 그 시선의 근거가 자신의 경험에 밀착되어 있음이 매력을 증폭시키고 글을 단단하게 다진다고 느꼈다. 그런 글은 힘이 세다. 정통으로 맞으면 많이 아플 수도 있고, 백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수도 있다. 각별한 시선을 통해 다양한 삶을 기록한 경험이 축적되어 일종의 내공으로 체화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남성지식인들이 쓴 책을 읽거나, 남성지식인들이 하는 강의를 듣게 될 때가 많다. 그 남성지식인들뿐 아니라 철학을 오래 공부했다고 하는 이들에게서도 ‘철학이 부재함’을 느낄 때가 많다. ‘철학서나 철학사를 요약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철학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만의 시선으로 인간과 사건을 바라보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도 많지 않다. 단지 ‘시선을 벼리기 위해 공부를 할 뿐’이라는 최현숙 선생님에게서, 오히려 ‘철학하는 이’의 풍모를 엿보았다. 그렇다고 존경과 애정을 앞세워 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본인의 작업을 하시며, 한 사람의 ‘선배여성’으로서 살아주시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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