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리터러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손미경 2022.06.02. 3장 팔기와 청나라의 제국통치 1. 민족의 정체성과 팔기 몽골 제국의 실패가 뚜렷하게 대비되는 청의 ‘성공’을 두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그 비결을 漢化에서 찾으러 하였다. 즉 적극적인 한화 정책 덕분에 성공적인 통치가 가능했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다른 여러 요인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청 제국은 단지 ‘중국’만 지배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홍타이지가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이래 청의 황재들은 줄곧 만주족이 한화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만주족에게 ‘국어(만주어)’와 ‘騎射’ 그리고 조상의 소박한 생활 양식을 지켜 나갈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청의 황제들의 희망과 멀어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만주족은 끝까지 자신들과 한인을 구별하는 정체성을 유지하였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팔기 제도이다. 청제국의 팔기는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세 하위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좁은 의미의 만주족이란 대체로 팔기만주 만을 가리키지만,18세기 말 이후가 되면 세 팔기를 모두 포괄하는 旗人에 대한 통칭이다. 2.팔기의 지배구조 아이신 구룬의 국민은 8개의 구사 중 하나에 속하였다. 8개의 각 구사 아래 수십개의 니루를 조직하고 이 니루는 민정과 군정이 합일된 기층조직이다. 아이신 구룬의 피지배층은 크게 자유민인 일반기인, 예속민인 노복으로 나눌 수 있고 일반기인으로 구성된 니루는 旗分니루, 예속민만으로 구성된 포의니루라 하고 기분니루는 공신가문 관리 니루와 황제 관리 니루로 나뉜다. 각 구사에는 旗主(호쇼이 버일러)가 총괄하는데 누루하치의 아들과 조카이다. 즉 아이신 구룬의 지배구조는 누루하치가 2개의 팔기, 나머지 6개의 팔기는 각 1명이 보유하고 이 팔기는 전쟁과 약탈의 성과물도 8개의 구사가 균등 분배하였다. 이후 홍타이지, 순치제는 3개의 구사를 보유함으로써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청의 융성이 유능의 군주의 잇다른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제위 계승 후보자자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제위에 올리는 방법에 있어 팔기의 지배구조는 제위의 계승향방을 가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순치제 때 그의 소유 구사를 上三旗(양황기, 정황기, 정백기), 나머지 다섯 구사를 下五旗라 한다. 그러나 기주가 구사에 대한 지배권을 보유하고 행당 구사의 기인들이 기주를 일차적인 충성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가 지속되는 한 당파가 형성되고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사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타파하고자 강희제의 적장자 제위계승 조치를 취했으나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정권의 안정은 팔기를 장악해야만 가능한 일. 옹정제에 이르러 기주의 구사에 대한 지배력을 대폭 약화시켜 팔기 전체를 장악한 후 청의 황제권을 반석위에 올렸다. 3. 다이칭 구룬의 초기 제국 체제 홍타이지는 몽골 제국의 정통을 이은 군주임을 선언하면서 대청의 자리에 올라 누르하치로부터 물려받은 팔기의 외연을 대폭 확대 하였다. 이이신 구룬과 다이칭 구룬을 구분해 보자면 전자는 여진국가로 여진인 팔기 구성원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였다. 후자는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 등 세 종류의 구사로 이루어진 나라로 팔기 안에 만주 외에 몽고와 한군을 포함함으로써 전자에서 나타났던 여진 국가의 색채를 벗고 명실상부한 만, 몽, 한의 다민족 재국으로 거듭났다. 홍타이지는 친왕, 군왕, 패륵, 패자 등의 서열을 갖춘 종실 봉작 시스템을 만들었다. 종실 왕공은 청 황제의 내번, 몽골 왕공은 청 황제의 외번의 지위를 누렸는데 특히 청 제국 체재에서 외번 몽골은 대단히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청 황실과 외번 몽골(칭기스 칸)의 관계는 혼인 동맹으로 청 말까지 약 6백여 차례에 이르는 혼인이 이루어졌다. 또 양자의 관계는 군사 동맹이기도 했다. 외번 몽골 외에 청 제국 체제 안에서 한인 친왕은 윈난, 광둥, 푸젠, 세 지역에 자리를 잡아 삼번이라 불렸으며 일존의 외번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외번 몽골은 1636년 蒙古衙門이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하였고 1638년에 이를 이번원으로 개칭하였다. 팔기의 구성원은 청 황제가 지접 지배하고 외번의 인민에 대한 직접 지배는 몽골 왕공, 한인 왕공, 조선 국왕의 몫이다. 다이칭 구룬을 1636년 태어난 생명체에 비유한다면 만주와 내몽골 초원이 탄생지라 할 수있고 그 성장 공간은 ‘중국’과 외몽골 초원, 티베트 고원, 준가르 초원, 타림 분지 등이라 할 수있다. 4.격리 정책과 본속주의 1760년 경 까지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청은 만주와 과거 명의 영토는 직접 통치하였고 내몽골,외몽골, 티베트 고원, 신장에 대해서는 간접 통치하였지만 직, 간접과 상관 없이 전략적 요충지에는 팔기 군대를 주둔시켰다. 제국 곳곳에 주둔하던 팔기를 駐防八旗 , 베이징에 주두하던 팔기는 禁旅팔기라 하였다. 당시 팔기 인구는 명나라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들이 섞여 살았다면 아마도 팔기는 분명 형체도 없이 녹아서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청은 팔기 인구와 한인 인구를 엄격하게 나누어 다스리는 격리 정책을 원칙으로 했다. 팔기 인구의 호적은 旗籍, 한인 인구의 호적은 민적으로 2중 호적으로 관리하여 양 호적 간의 통혼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법률적, 사회적으로 분리하였다.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1. 네르친스크-캬흐 조약 체제 청의 제국 통치는 어디까지나 팔기를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한인에게 문호가 닫힌 분야는 제국 내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對 러시아 외교에서도 한인의 참여가 일관되게 배제 되었다.서양국가들 가운데 유독 러시아만 이미 오래전에 청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은 상태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본질적인 ‘불평등’한 조공관계가 아닌‘평등’한 조약 관계로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청, 러시아 관계를 ‘조공체계’와 ‘불평등 조약체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네르친스크-캬흐 조약체계‘라고 정의’ 두 조약의 가장 큰 특징은 호혜 평등성이다. 또한 이 조약들의 이면을 보면 청이 준가르와 러시아 동맹체결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맺은 조약으로 對러시아 외교를 광의의 ‘몽골 문제’로 취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러시아와 몽골 문제 준가르의 갈단이 할하를 침공하고, 할하의 왕공들이 청에 구원을 청하면서 대거 남하하였다. 청은 러시아와 준가르의 동맹가능성을 차단해야할 필요성이 커졌다. 1689년 청은 네르친스크를 회담장소로 하고 송고투가 이끄는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회담의 결과 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조약의 체결되었고 이 조약의 체결로 청과 러시아는 1650년대 이후 수 십 년을 끌어온 헤이룽장 지역의 분쟁을 종식하였다. 러시아 표트로 1세는 ‘중국’과의 통상이란 숙원을 풀었고 강희제는 갈단과의 대결에 전념 할 수 있었다. 실제 체결 과정에서는 ‘몽골 문제’가 중요 변수였으며 40년 후 체결한 캬흐타 조약 역시 같은 문제였다. 카흐타 체결 이후 청은 1730년대 초 준가르와 한바탕 공방전을 벌였다가 알타아 산맥을 경계로 강화를 맺었고,1750년대 후반에 준가를를 멸망시켰다. 준가르의 위협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러시아와 평등 조약에 기초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3. 한인 , 한문의 배제 두 조약이 양국의 평등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화이질서의 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 한문텍스트에는 만주어로 된 조약문의 평등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료를 비교해 내린 결론은 조약문의 몇 몇 자구를 ‘수정’하여 화이질서의 원리를 벗어난 두 조약의 이례적 성격을 교묘하게 ‘은폐’하였다고 한다. 이는 청 제국의 ‘중국’ 지배 전략과 관련하여 주목할 언어 문제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일단 청의 협상 대표단 7명 모두 고위 관직의 만결이었으며 작성된 조약문은 러시아측은 라틴어, 러시아어 조약문을 청은 라틴어, 만주어 조약문을 각 각 작성 하여 양측이 교환하였다. 언어의 측면에서 ‘한문의 배제를 네르친스크 조약의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캬흐타 조약 역시 같은 상황이다. 17세기 말 이래 청나라의 對 러시아 외교에서 관찰되는 ‘한인과 한문 배제’ 현상은 적어도 1850년 대 초까지 지속 되었다. 이런 양상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뿐 만 아니라 번부 지역에 대한 통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청제국의 간접 지배 지역과 번부는 모두한자 문화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부와 주고받는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드는 개인적인 생각
역사상 ‘중국’전체를 지배한 나라로 ‘수명’이 200년을 넘긴 나라는 당과 청이라고 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청 제국의 모습으로 지금의 중국을 상상해 본다. 과연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19세기 까지는 팔기로 만주어로 기인과 민인을 격리하고 신분의 上下이동을 막는 정책으로 유지되었을지는 몰라도 20세기에는 오히려 위에 열거된 시스템으로 인해 새로운 중국의 건설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 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