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소재, 주체의 문학 에레혼 토지신: 옥황상제에게 추천하여 귀비께서 신선의 반열에 오른다해도,
그녀는 여전히 치정을 품을 것입니다. 선궁에 간다 하여도 혼자 지낼 것이니, 부부로 지내자는 과거의 맹세 오래도록 증명되기를 원합니다. 직녀:
이것은 좋은 치정이군요. _ 홍승洪昇, 《장생전長生殿》[1] 위 글은 청나라 사람 홍승이 1688년에 쓴 희곡작품 《장생전》의 한 부분이다.
《장생전》은 그 유명한 당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희곡은 정말 전개가 빠르다. 두 사람은 썸타는(?) 시간도
생략한 채 두번째 회차부터 연인이 된다. 한술 더 떠서, 이야기가
절반에 다다르면 양귀비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나라를 위태하게 만들었던 ‘안사의 난(安史之亂)’[2]이
바로 현종 시기에 일어난 것이고 양귀비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었다. 《장생전》에서도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던 행렬의 군인들이 양귀비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주인공이 이렇게
일찍 죽으면 남은 분량은 무슨 이야기로 채우나? 위에서 본 내용이 후반부의 주된 이야기이다. 즉, 양귀비가 천상세계에서 당 현종과 어떻게 재회하는지, 이 부분이 《장생전》의 또 다른 중요 스토리
되겠다. 그런데 예전부터 중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경국지색으로 불리던 양귀비는 어떻게
문학 작품의 주된 소재가 될 수 있었을까? 홍승이 현종과 양귀비가 ‘영원히
살며(長生)’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한풀이라도 시켜주려는 박수처럼 보일 정도이다. 《장생전》 곳곳에 충신이 등장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고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난 독자에게는 현실세계를 초월한 사랑만이 기억날 뿐이다. 양귀비를 묘사하는 관점이 변화하기 시작한 때를 살피려면 청조에서부터 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홍승이 《장생전》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면 아마도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에게 두둑히 챙겨주어야 할 것이다. 백거이는 806년에 《장한가長恨歌》라는 시를 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했다. 이
작품에서도 두 사람의 만남과 사별, 그리고 환상을 통한 재회 등 《장생전》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홍승의 작품이 스토리가 훨씬 다채로운
측면이 있지만, 백거이가 ‘감히’ 현종과 양귀비를 비련의 한 쌍으로 그리지 않았다면 《장생전》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길,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길. 하늘과 땅 영원하다 하여도 다할 날이 있겠지만, 이
한은 끊기지 않고서 다할 기약이 없을 것이다.”[3] 아련하기
그지없는 《장한가》의 마지막 구절을 보고 있으니, 백거이가 양귀비 이야기를 잘 ‘이용해먹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거이는 양귀비가 죽은지 20년도 지나지 않은 때에 태어난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백거이가 활동하던 시기는 양귀비에 대해서 재평가조차
이뤄지지 않은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인은 아마 누구도 손대지 않은 소재를 발견하고 기뻐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당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끌고갔던 원흉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800여년의 시간이 흘러, 이런
문화적 자양분을 잘 흡수한 홍승은─비록 본인은 《장한가》를 읽을 때마다 ‘번번이 여러 날을 못마땅해했다(輒作數日惡)’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장생전》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중국 전통 희곡의 유명인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장생전》은 애정고사와 정치
주제를 잘 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사람들마다
시각이 갈린다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정치적 문학 해석이 주류를 이룰 때, 그리고 개혁개방이후 이전 문학 연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올 때 모두 《장생전》의 주제를 달리 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이 세미나는 《글쓰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다》를 읽고 하는 이야기 아니냐며, 어떤
분은 여쭤보실 수도 있겠다. 이렇게 한 페이지 가량을 다른 문학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중국 문학사의
경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내내 이야기 한 문학사의 한 단면은 여성의 이야기인가, 여성을 소재로 한 이야기인가. 홍승은 《장생전》을 지은 이유를 소개하면서, 이전 시기 문인들이 양귀비를 다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역사가들이
두 사람의 일화에만 몰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중국 문학(혹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은 글 쓰는 누군가가 발견해야만 거론 될
수 있는 존재였으며, 어떤 사람의 재평가를 기다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글쓰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다》의 출간 소식을 몇 년 전에 접했을 때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지금껏 중국 문학에서 현대 여성 작가를 소재로 한 단편선도 있었고, 유명한
여성 작가의 일대기를 다루는 책들도 존재했다. 그런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통시기의 여성 문인들의 삶을
오롯이 다루는 구성은 아마도 국내에서 처음이 아닐까? 목차를 들춰보니 몇몇 문인을 제외하고는 생경한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첫시간에 읽게 된 탁문군卓文君, 반소班昭, 채염蔡琰은 그래도 익숙한 이름들이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작가들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한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책에서 다루는 열두명의 문인들 가운데 탁문군, 반소, 채염은 한나라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나라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유가와 정치가 일치되면서 그 이외의 모든 것들 것 배척받았다는
시대. 그동안은 유가 지식인들이 아니면 참 살기 어려운 시대였겠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나 《글쓰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다》를 보고 나니 이 시기에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누군가는 사회의 규율로부터 자유롭고자 했고,
누군가는 남성 지식인 못지 않은 문인으로 살았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속절없이 연고도 없는
지역에 포로로 끌려가야 했다. 이러한 선택지에 거론조차 되지 못한 삶이 허다할텐데, 탁문군, 반소, 채염이
마주한 삶의 선택지를 자체가 낯설다. 반면 이들의 이야기마저 20세기
지식인들에게 주목 받으면서 다시 화제거리가 되었다는 점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익숙한 결말이라 씁쓸하기도 했다. 발제문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다시 《장생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서두에 인용한 부분 가운데 조금 특이한 표현 방식이 존재한다. 바로 ‘치정癡情’이라는 단어이다.[4] 지금
이 단어는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적어도 홍승은 치정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뉘앙스를 담지는 않은듯하다. 작품속에서
양귀비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정에 몰두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치정이라고 일컫는 것은 아닐까? 사랑에 대한 몰두가 현실세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니, 홍승은
양귀비의 사랑이 다른 상식이 통하는 공간(=선계仙界)에서
마음껏 이뤄질 수 있도록 작품을 구상했으리라. 책을 통해 만난 사람 가운데 탁문군이 이렇게 정에 몰두한 인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학작품에서는 작가에 의해 치정의 상식이 통하는 세계로 이동할 수 있다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렇지 못한 여성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던가? 여성
문인에 대한 재평가, 여성 중심의 문학사라는 키워드를 생산하는 주체가 누구였는지 주목하는 것도 《글쓰는
여성은 잊히지 않는다》를 읽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 양귀비의 죽음 이후를 어떻게 처리할지 신선세계에서 논의하는 장면이다. 대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雖則保奏他仙班再居, 他卻還有癡情兒幾許. 只恐到仙宮, 但孤處, 願永證前盟夫婦.” “是兒好情癡也..” [2]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을 필두로 일어난 반란이라 안사의 난이라고 부른다. 755년부터 763년까지 일어났다.
중앙에서 세력을 쥐고 있었던 양귀비의 사촌오빠 양국충과 지방 절도사였던 안록산의 정치적 알력다툼으로 시작된 반란이다. 이후에 안록산의 부하였던 사사명의 난이 연달아 일어난다. 두 번의
반란 모두 조정이 초기 진압에 실패했으며, 당을 멸망 직전까지 이끌었던 반란이라고 불린다. [3]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4] 치정이라는 단어에 대한 재해석은 “이지은, 《장생전》의 치정 - 치정인물 양귀비의 형상과 치정의 특징, 고려대학교 중국학논총, 2006, 3-5쪽.”을 참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