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자기 자신을 진리와 멀어지게 하라 (0411 발제)2019-04-11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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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첫부분 발제.hwp (32KB)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한 사람에게 가상의 성격(캐릭터)을 부여한다.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태도, 이론, 삶의 가치는 평가절하 된다. 한 사람의 것이라고 묶기 힘든 푸코의 다양한 작업과 활동을 보며 사람들은 일관된 성격을 부여하기에 곤란함을 느꼈다. 1983년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 점을 지적하자, 푸코는 이렇게 답했다. “그럼 당신은 제가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해서 변함없이 똑같은 주장만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24쪽)

 

마치 내가 그 인터뷰 장소에 있기라도 한 듯, 짜릿한 시원함 속에 혼자 무릎을 치게 된다. 나는 이 대답이 푸코의 작업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문장이라고 본다. 푸코는 비판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사람이다. 푸코는 우선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했다. 비판은 비난과 다르다. 적대감이 비판을 가능하게 하지도 않는다.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비판의 목적은 변화에 대한 기대이다. 비판을 통해 무언가를 몰락시키거나 전복해야 할 경우라도 목적은 역시 변화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비판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반복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자기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스스로 ‘진리’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비판의 실패를 의미한다.

 

나는 푸코가 스스로 진리와 멀어지려 했다고 본다. 비판은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모든 것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자기 자신의 정당성마저 뒤흔드는 태도가 바로, 푸코가 말하는 ‘비판’이다. 자명한 진리로 여겨지던 학설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써내려가려 했던 푸코에게 누군가는 감탄하지만, 누군가는 회의의 시선을 던지며 묻는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푸코 당신의 말은 진리인가?’ 세미나에서 종종 제기되는 물음이다. 나는 푸코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답했으리라 믿는다. 푸코에게 던진 의심에 찬 누군가의 시선도 비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회의가 다시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판은 바로 실패할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다. 진리의 길은 멀고, 의심하기는 쉽다고.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며, 또한 열심히 연구하면서 의심해야 하고, 자기 자신마저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 의심이 어찌 쉽다고 하겠는가. 이런 의심의 가시밭길에 비하면, 자명한 진리에 복종하는 일은 무난한 꽃길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는지. 자신의 말이 진리이니 믿고 따르라고 하는 ‘교주’들은 얼마나 많은가. 의심의 가시밭길을 버리고 그 길을 따르면, 주변 사람을 포함해 여럿이 편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편해지지 않겠는가. 아무 변화도 기대하지 않고 늙어가면서 고요하고 편안하게. 가끔씩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의심을 꾹꾹 누르면서.

 

물론 우리의 푸코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진리라고 떠드는 보수 기독교가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함을 깨닫게 된 푸코였으니 말이다. 푸코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진실에 도달하면서, 자신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동시에 ‘비정상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정체성을 통한 차별과 배제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로 나타난다. 누군가가 자신이 어떤 형태의 성애를 원한다고 말할 때, 사회는 차별과 배제를 위한 일종의 표식으로 정체성을 부여한다. 푸코는 제도와 실제 개인의 삶 간에 존재하는 균열과 괴리를 포착했고, 그것에 저항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푸코는 일생 동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고, 한편으로 자신의 연애와 연인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성애자들이 늘 그러하듯이.

 

푸코는 제도의 피해자로만 남고 싶지 않았다. 푸코에게 권력은 늘 관계의 문제였다. 관계는 일방적 지배/피지배가 아니라, 태도와 역량의 각축을 의미했다. 푸코는 권력이 소유되는 게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권력은 무언가를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의 문제이기도 했고,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했다. 교육부 관료 임용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배제된 적이 있을 때 푸코는 그 이유가 자신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때문에 푸코는 교육부 관료나 대학의 학장이 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푸코는 권력 자체를 혐오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고민했다.

 

푸코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프랑스의 ‘68혁명’을 들 수 있다. 푸코는 현실의 교육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1965년부터 드골 정권의 교육개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1967년 푸코가 참여한 위원회가 교육개혁안을 내놓기 전부터, 프랑스의 대학생노조는 교육부에 반발하며 반대집회를 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 집회를 68혁명의 도화선으로 여겼다. 68년 5월 당시 푸코는 교육위원회 활동을 끝내고 튀니지에 가 있었다. 68혁명을 간단히 말하면, 반권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비판적 경향이었다.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적 대안으로 삼는 기성세대의 권위에 저항하는 청년세대는 새로운 물음들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가, 집안에서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인가 혹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별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이었다.(42쪽)

 

68년의 혁명에 놀란 프랑스 교육부는 ‘대학자율화, 학문 간 벽 허물기, 수용자 참여’를 허용했다. 뱅센 숲에 새로운 ‘실험대학’이 만들어졌고, 튀니지에 있던 푸코가 돌아와 철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했다. 푸코는 당시 청년들이 제기한 물음에서 ‘정치성의 정의가 확장되어 가는 현상’을 인식했다. 이 인식은 이후 푸코의 연구와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교수로 참여한 마오주의자들은 학교 안에서 교수와 학생의 구분, 학문 간의 구분을 허물었고, 전통적 형식의 시험을 치르려 하지도 않았다. 학과장인 푸코는 교육부의 비난에 직면했고, 학문이나 철학의 전통적 형식에 대해서도 회의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68혁명 이전 학생들이 거부하던 교육개혁위원회에 참여했던 푸코는 점차 격렬한 투사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뱅센대학에서 2년을 보낸 후 푸코는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만 교수로 임용되는 이 학교는 누구나 강의를 신청해서 들을 수 있다. 강의는 늘 푸코가 관심가지는 주제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현상을 색다른 관점에서 날카롭게 분석하면서도, 손쉬운 해법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구체적 지식인’은 정파적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적 환상을 거부해야 한다고 푸코는 주장했다.(53쪽) 푸코의 연구는 정치나 제도, 현실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또 지식인으로서 누군가를 대변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배제된 이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해석보다는 기술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푸코가 찾으려 했던 것은 명확한 인과관계나 자명한 해답이 아니다. 푸코의 저술이나 강연록을 끝까지 읽고 나면 중간에 갑자기 끝나버린 미완의 작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렇게 끝난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는 반응이 절로 나온다.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하는 푸코의 망설임, 독자 혹은 청중들에게 자신의 강의가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푸코의 기대를 종종 읽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푸코의 어떤 의도를 엿본다. 자기 자신을 진리와 멀어지게 하기. 모든 이야기의 결론에서 자신의 견해가 유일하게 자명하고 정당한 무엇으로 여겨지는 일을 경계하는 태도이다.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는 푸코는 ‘독자의 탄생’을 종용한다. 그럼 우리 이 종용에 힘입어 의심의 가시밭길을 함께 걷는 독자가 되어보시는 건 어떨지. 모순 속에서 회의하는 푸코를 친구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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