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마주선 언어학 에레혼 언어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상은,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체만을
위해 고찰되는 언어이다. _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언어 철학’이라는
단어를 보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불편한 만남’. 아마도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훨씬 더 못마땅했으리라. 철학과 동일선상에 놓인 적이 없던 언어 분과가 어느
순간 철학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니! 지난 유행이라고 해도 철학사에 언어 철학의 족적은 깊이 박혀 지금까지
인문학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 5장이 학문의 가치전도 과정으로 보여
흥미로웠다. 어쨌든, 언어와 철학의 불편한 만남은 여러 논의를 촉발시켰다. 한편에서는
철학적 확실성이란 문법의 환상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도 문법적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되는 문장이다. 애초에 대다수의 언어가 주어 없이 말을 만들지 않기에 ‘주체’의 존재가 분명해진다. (여담이지만, 철학의 헤게모니를 주도한 서구 1세계 대다수의 언어는 주체를 나타내는 주어를 문장 맨 앞에 배치하는 어형이 특징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언어에 대한 연구(혹은 사람들의 언어
사용에 대한 연구)를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파악하는 작업으로 본다. 이 주장의 근거 역시 단순하다.
‘상이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책에서는 같은 대상에
대해 언어권마다 남성형 또는 여성형 명사로 다르게 분류하는 현상을 예로 든다. 이와 같은 경우 해당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 또한 달라진다. 언어의 연구를 인간의 사고에 관한 연구로 확장해 나가는 작업은
곧 주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훔볼트: 언어학적 칸트주의 훔볼트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활용하여 다양한 언어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언어권 화자마다 서로 다른 사고 방식, 개인의 사고에 대한 언어의 제약 등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던 이유도 그의 직업과 연관된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그의 철학에 대해 다섯 가지로
나누어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1) 언어는 통일적 유기체이다. 특정한 단어는 언어 체계 내에서 결합될 수 있는 짝과 유기적인 관계를 이룬다.
(2) 언어는 정신적인 활동이다. 이는 언어를 활동의 결과물로 보았던 시각을 뒤집는다. 훔볼트는 언어가
사유활동에서 독립되어 있다고 전제하긴 했으나 동시에 언어가 사유 없이 존재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고 본다. (3)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모국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에게 사고의 틀로 작용한다. (4) 동일한 국민의 언어, 혹은 한 민족의 언어에는
비슷한 종류의 주관성이 있다. 훔볼트에 따르면, 각각의 모국어에 의해 형성된 사고구조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에 따라 고유한 개성을 갖는다. 이를 통해 ‘번역투’라고 불리는 문장이 어색한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A라는 언어 형식의 고유한 특성을 B 언어로 그대로
옮길 경우, 원문의 사고 방식까지 그대로 전이되기 때문에 생경한 말이 된다. (5) 주체의 활동은 사유 속에서 대상을 형성한다. 사유란 애초에 언어를 통해 발생하므로 대상이 언어를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대목에서 훔볼트가 칸트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칸트가 말한 ‘사고의 기초가 되는 선험적 주체’라는 도식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주체들은 반드시 언어(모국어)를 통해 사고하기에 훔볼트에게 언어는 ‘선험적 구조’이다. 결론적으로
훔볼트의 철학은 언어를 통해 재건된 새로운 형태의 주체철학이다. 이와 같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논리학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하는 일이 발생한다. 인간의 사고를 제약하는 언어적 규칙을 문법이라고 칭할 때, 철학적
명제들도 문법의 환상에 불과한 단어 뭉치가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고는 논리학의 범용성ㆍ불변성을
위협한다. 논리학이야 말로 문법적 규칙을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학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이 서구권에서
연원하였다는 데에 주목하자. 이들의 언어적 규칙을 기반으로 논리가 형성되었다면, 서구권 언어가 아닌 지역에서 이 ‘논리’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니체의
지적대로, 동일률이니 모순률이니 하는 논리학의 대원칙은 누군가 증명한 적도 없다. 단지 논리학에는 만물을 같은 틀에 맞추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만이 존재할 뿐! 소쉬르의 언어학적
‘혁명’ 대상과 그 대상을
지칭하는 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 이것은 언어와 대상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소쉬르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유사관계 혹은 일치관계를 부정한다. 책에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역시 다섯 가지로 나누어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1) 언어활동은 랑그(langue; 언어)와 파롤(parole; 화언)로 나뉜다. 랑그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해 말을 할 때 따라야 하는 규칙이나 체계를 의미한다. 이 규칙을 통해 화자가 언어를 뱉을 때, 그 결과물을 파롤이라 부른다. 소쉬르가 언어학의 대상으로 명시한 개념은 랑그였다. (2) 기호와 그것에 담긴 의미 사이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시니피앙sinifiant; 표시하는 것)와 기의(시니피에sinifie; 표시되는 것)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시계를 시계라 부르고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는 일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과이다. 기표는 대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변화할 수 있다. (3) 소쉬르는 공시성과 통시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공시성은 어떤 기호를 사용할 때 동시에 갖춰야 하는 조건들을 말한다. 이와
달리 통시성은 특정한 언어의 역사적 변화와 관련된 개념이다. 따라서 공시언어학은 언어의 규칙과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통시언어학은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소쉬르는 전자의 탐구 방식을 중시하였다. (4) 언어를 조직하는 틀로는 결합관계(syntagma)와 계열관계(paradigme)가 있다.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문장을 예시로 들어보자. 이 문장을 만들
때 단어가 앞뒤로 배열되며 맺는 관계가 바로 결합단계이다. 반면 ‘나’─’밥’─’먹는다’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단어도 존재한다. 이렇게 대체할 수 있는 관계의 축을 ‘계열관계’라고 부른다. (5) 소쉬르 언어학에서 기호의 ‘가치’ 역시 주요 개념이다.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정된다. 특정한 단어는 다른 단어와 차별성을 지니기 때문에 사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단어를 별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회의 가치는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 언어학 강의>는 철학계에
큰 지각변동을 가지고 온 연구서이다. 소쉬르의 주장에 따르면, 주체의
자명함이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게 된다. 시비/선악판단처럼
간단하고 자명해 보이는 사고조차 언어의 의미체계 속에서 일어날 뿐이다. 그러나 주체 중심의 사고관을
해체한 소쉬르의 연구는 탈근대로 진입함과 동시에 다시 후퇴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는 소쉬르 언어학에서
구조라는 개념이 함정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사고 과정에서 얽매이게 되는 언어의 구조란, 칸트적 의미로 ‘선험적 구조’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외에도 소쉬르
언어학에는 또다른 내적 모순이 존재한다. 즉, 기호의 의미가
구조 안에서 고정된다고 보는 근대적 측면과 체계 속에서도 기호의 가치가 변화할 수 있다는 탈근대적인 측면이 소쉬르 언어학에서는 동시에 발견된다. 소쉬르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한 대표적인 언어학자들을 ‘프라하 학파’라고 지칭한다. 책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로 야콥슨을
설명하고 있다. 야콥슨은 인간의 기호사용 능력을 위주로 자신만의 언어학을 정립한다. 그는 환유와 은유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환유는 특정한 동사에 ‘누가, 무엇을’ 등의 인접한 문법 요소들이 단서 조항처럼 붙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은유는 문장 형식에 배치될 수 있는 유사한 기호들이 선택 및 대체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야콥슨에 이르면, 구조주의는 인간의 선험적 언어사용 능력을
언급한다. 야콥슨은 자신의 환유ㆍ은유 개념을 실어증 환자에게 적용하였는데, 이러한 연구는 인간에게 선천적 조어 능력이 있다고 전제한다. 이와
같은 학문적 시도는 훔볼트의 칸트주의와 직결된다. 또한 야콥슨은
소통이라는 개념을 언어학에 적용하고 이를 도식적으로 개념화해낸다. 소통을 위한 보편적 요인들은 언어학의
보편적-과학적 성격을 강조한다. 소통이론에서 발신사와 수신자
사이의 메시지는 ‘코드’를 통해 해석된다. 달리 말하면, 이 코드는 메시지의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다. 소통에서 진리의
추구를 중점으로 보았던 야콥슨은 소쉬르 언어학에 주체철학ㆍ과학주의의 색을 덧입힌 셈이다. 비트겐슈타인: 언어게임과 언어적 실천 구조언어학은 사고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계 역시 분명했다.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에서는 구조언어학의 논리대로라면 새로운
언어의 학습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에서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명한 개념’을 학습하는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면 될 문제라고 응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콥슨의 설명 방식은 자명한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국어 학습자의 언어 습득을 설명할 수 없다. 한층 더 회의적으로
접근하면, 대상을 지시하여 언어를 설명하는 방식 역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지시 방식은 대상의 명칭에 대한 설명인지, 지시 대상의 동작에
대한 설명인지 불분명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연구는 구조주의와 실증주의의 난관을 탈피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명제를 부정한다. 대신 그는 단어의 의미가 곧 단어의
용법이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연구에 의하면 단어의 학습은 단어의 사용방법의 터득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규칙이나 구조를 강조했던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구조언어학과 달리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외국어 습득으로 되돌아가 설명하자면, 외국어
학습자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환경 속에서 언어가 실천되는 양상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실천이란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규칙이란 각 사회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규칙과 생활방식의 관계는 상호적이라서 어느 경우에는 생활방식 속에서 규칙이 형성ㆍ변화되며, 반대로 규칙이 모여 생활방식이 구성되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대목에서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언어게임이란 특정한 규칙에 따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이 서로 교차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언어적ㆍ비언어적 활동 모두가 따라야 하는 규칙들의
집합이자 규칙에 따른 행동의 집합이다. 따라서 언어 행위에 있어 맥락을 제공하는 것도 언어게임이다. 언어 학습을 언어게임과 연관 지어 설명하자면, 외국어 학습이 가능한
이유는 맥락 가운데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고, 유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배운 것에 근거하여) 적절하게 응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언어게임이 상이하다는 말에는 언어적ㆍ비언어적 실천이 기준으로
삼는 규칙도 다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외국어 학습이란 문법(구조) 공부에만 달려있지 않고 그 나라의 생활 형태, 그리고 그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게임을 습득하는 일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언어게임 개념에서 규칙이 랑그와 같은 완결되고 불변적인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활형식이 중요하게 사용된 사실에 주목하자. 생활형태의 일부분인 규칙은 변화무쌍한 성질을 갖는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연구는 의미를 단지 기호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입장과도 다르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생활형태 개념이 맑스의 생활양식 개념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일하다’라는 단어로 예를 들어보자.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집요정은 기꺼이 마법사의 허드렛일을 하려는 생명체이다. 이
세계관에서 마법사가 집요정 해방전선을 구축하려 한다면? 다른 마법사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생활형태의 차이로 인해 언어게임 사이에 싸움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언어게임의 싸움은 생활형태가 다르기에 충돌한다. 다시 해리포터로 예를 들어보면, 마법사 가문 출신이 아닌 헤르미온느가
집요정의 자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머글 사회의 생활형태로 마법사 사회를 바라보는 탓이다. 주인공 해리포터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본성적으로 원해서 일을 하는 집요정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유로 보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앎은 사실 안다는 믿음이며, 진리 역시 확실하다는 믿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는 진리값도 계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연구에서 동떨어진 부분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되기 마련이며, 정당화의 과정은
자신이 옳다고 근거를 세우는 노력이다. 그러나 비트켄슈타인에 따르면 이런 정당화은 무한히 계속될 수
없으며, 어느 순간에 행동으로 귀결된다.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에서 믿음은 출발하며, 이 믿음에서 모든 지식은 출발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진리를 재정의한다면,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 곧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한 실천은 실증주의자가 중요시한 실천과 다르다. 실천주의자는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실천 개념은 ‘진리효과’에 의해 특정한 지식이 정당화 혹은 부정되는 기능을 중시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서 ‘주체’란 대문자 S의 고정된 것이 아닌, 언어게임을 통해 활동하는 개개인을 가리킨다. 개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생활형태와 언어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한 믿음에 의거하여 형성된다. 이처럼 언어게임과 ‘주체’가 번갈아 작동하는 형태는 언어적ㆍ비언어적 실천을 통해 이뤄진다. 정리하자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실천’이란 맑스 철학의 ‘실천’만큼이나 핵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어떤 단어─‘지식’, ‘존재’, ‘대상’, ‘자아’, ‘명제’, ‘이름’─를
사용하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애쓸 때 우리들은 언제나 이렇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자신의
고향인 언어에서 실제로 늘 그렇게 사용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단어들을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그것들의 일상적인 사용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다. _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